손목에 진동이 느껴졌다. 시간은 새벽 5시. 조심스레 짐을 챙겨 게르 밖으로 나왔다. 기지개를 한껏 켜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어둡고 별은 밝았다. 사실 어제 일몰을 보며 바양작에서 일출을 봐야겠다 마음먹었다. 미리 봐둔 지표들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돼서 그리 어려울 것 같진 않았다.
방향은 동쪽. 손전등을 비추니 희미하게 초소 건물과 울타리의 윤곽이 보였다. 한밤중에 혼자 가려니 잔뜩 긴장이 되긴 했지만 한편으론 어떤 풍경을 보게 될지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초소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울타리가 보였고 어느덧 불안했던 마음도 진정됐다. 울타리를 지나기 바로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울타리를 넘어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등골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방금 전까지는 지평선 위로 떠오른 초소와 울타리의 실루엣 덕분에 방향을 잡기 어렵지 않았는데 울타리를 넘어서자 노이즈가 잔뜩 낀 오실로스코프 화면처럼 울퉁불퉁 출렁이는 지평선만 감지할 수 있었다.
일몰 때 보았던 낙타 조형물은 어둠에 완벽히 묻혀 버렸고 불규칙한 지평선 때문에 바양작의 위치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제자리에 서서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되돌리기를 반복했다. 울타리 너머 세상을 잠식한 어둠은 두려움인 동시에 설렘이었다. 문득 그냥 앞으로만 가면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몰 때 기억을 떠올려보면 바양작은 숙소와 일직선상에 있었고 그냥 똑바로 만 가면 됐다. 동쪽 끝에 솟아오른 지평선 형태를 눈에 담아두며 앞으로 전진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안해지려는 찰나 눈앞에 낙타 조형물이 보였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검은 천 끝자락에 잉크 한 방울이 스며든 듯 칠흑 같던 어둠 위로 푸른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검푸르던 하늘은 점점 더 푸르게, 더 밝게 번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둠과 빛이 손을 맞잡는 찰나의 순간이 찾아왔다. 검은 벽처럼 닫혀 있던 하늘이 시나브로 열리고 있었다.
완전히 어두운 것도 그렇다고 밝은 것도 아닌, 어딘가 경계 위에 선 듯한 그 시간. 조용하고 고요하면서도 무언가 큰 변화가 일어날 것 같았다. 마치 세상이 숨을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꿈과 현실 사이를 걷는 순례자였다. 바양작이 곧 나타날 거라는 확신과,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초원의 허무함 사이에서, 나는 푸른빛을 따라 걸었다.
바양작에 올라서자 숨이 가볍게 차올랐다. 구름은 적당했고 공기는 선선했다. 붉은 협곡 너머 지평선 가장자리에서 태양이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위의 능선 하나하나가 그 불길한 빛 아래 검붉은 실루엣을 세웠고 세상은 서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빛으로 점령되기 시작했다.
숨이 멎을 듯했다. 처음엔 구름이 붉게 타오르더니 다음엔 불길이 바위로 번졌다. 세상 전체가 거대한 화염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평선 너머로 압도적인 붉은빛이 세상을 집어삼킬 듯 밀어닥쳤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붉은 사암 절벽 위로 진홍빛 여명이 떠오르는 풍경 때문 만은 아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은커녕 인기척조차 없고, 바람 소리와 붉은빛만이 나를 감쌌다. 나 홀로 이 거대한 풍경을 독점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설명하거나 나눌 필요도 없이,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이 풍경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속 깊이 파문이 일었다.
그리곤 잠시 불길이 수그러들었다. 진홍빛 하늘은 자줏빛으로 옅어졌고 협곡을 타고 흐르던 붉은 기운도 서서히 색을 거뒀다. 그 사이 초원의 그림자들이 다시 길어졌고 사암 위의 색조도 한순간 부드러워졌다. 마치 세상이 숨을 고르듯 모든 것이 정적에 잠겼다. 바람도, 새소리도, 그림자도 멈춘 듯했고 그 고요 속에서 나도 처음으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긴장했던 심장은 어느새 스르르 풀렸다.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상이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이제 내쉴 차례라는 듯 다시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핏물이 번지듯 진한 주홍빛이 스며들었고 그 색은 순식간에 하늘 전체로 번졌다. 태양은 명작을 남겨보겠다 다짐한 듯 가장 뜨겁고 붉은 붓으로 하늘 가득 구름을 진홍에서 선홍으로, 선홍에서 금빛으로 물들였다.
협곡은 붉은빛을 정면으로 받아냈고 모래 절벽은 타오르는 숯덩이처럼 환해졌다. 마치 스스로 빛나는 존재처럼, 태양이 아니라 그 협곡이 하늘을 밝히는 듯 말이다.
그리고 모든 붉음이 절정에 달하던 바로 그 순간, 태양이 숨을 멈춘 세상의 틈을 가르고 불쑥 솟아올랐다. 그 빛은 따뜻함이 아니라, 뜨거움이었고 부드러움이 아니라, 날 선 살아있는 생명이었다.
나는 그 빛 속에서 마치 지구라는 행성을 처음을 보는 듯한 묘한 경외감에 휩싸였다.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자연의 가장 순수한 힘으로 연출한 극작품 같았고, 나는 벅찬 감동에 숨조차 들이쉴 수 없었다. 그건 시작이었고, 끝이었으며, 내가 이 여정에서 마주한 가장 완벽한 아침이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순간, 지평선을 뚫고 떠오르던 태양은 순식간에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태양의 마법은 끝나 버렸다. 아쉬움은 없었다. 이미 내 몸도 정신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 붉음의 정점을 찍었으니 말이다.
발걸음을 돌리는데 사암 절벽이 무너진 듯 붉은 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산사태라도 난 건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데 먼지 사이로 흰 점, 검은 점, 갈색 점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자세히 보니 염소 떼가 폭포수처럼 절벽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염소들은 절벽 아래 초원까지 달려가더니 동그랗게 모여 풀을 뜯었다. 해는 구름 뒤에 보일락 말락 숨어 화사한 아침 햇살을 내렸다. 빛은 구름 사이에서 방향을 틀며 쏟아졌고, 협곡과 절벽, 모래와 바위에 무늬처럼 엷게 내려앉았다.
무언가 형용하기 힘든 풍경이었다. 사진전에서나 볼 수 있을듯한 장엄한 풍경이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염소 떼의 일상과 어우러지며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멋들어진 협곡이 국립공원 보호 구역이고, 몽골 정부가 자연 유산으로 관리한다는 걸 염소가 알리는 없었다. 방금 전 하늘을 반쯤 채운 구름이 벌겋게 타오르던 일출이 얼마나 극적이었는지도 말이다.
나에겐 너무도 경이롭던 이 모든 순간들이 염소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어쩌면 나와 염소 사이의 간극은 내가 울란바토르에서, 그리고 버기네 게르에서 느꼈던 거리감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나브로 떠오르는 의문들이 활시위처럼 팽팽히 긴장했던 심장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게르 캠프로 돌아가는 길 어둠 속에서 윤곽만 봤던 낙타 조형물을 앞을 지났다. 구름 사이 아침 햇살이 그들을 이끌듯 앞길을 밝혔다.
어느덧 캠프 앞에 도착하자 식당 근처에 모여있는 일행들이 보였다. 윤설은 나를 보고는 활짝 웃으며 뛰어왔다. 신이 난 듯 아침에 일출 봤냐고, 자기도 주영과 잠옷 바람으로 나와 봤다며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속 풍경은 내가 보았던 하늘과 같은 하늘을 품고 있었다. 풍경은 다른 듯 같았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두 곳에서 올려다본 하늘이 그녀와 나에게 동시에 닿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붉음을 보았을 때 그녀도 나처럼 황홀경에 잠겼을까?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고 손끝 한번 닿지 않았지만 우리 마음은 한순간 같은 색으로 물들었겠지?
사진 속 붉은 격랑이 물결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늘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윤설도, 주영도, 나도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