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가 되자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버기는 어디선가 장작더미를 한 박스 들고 와 건우 팔 위로 턱 하니 올렸다. 엄지를 한 번 치켜올린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린 장작더미 주위로 의자를 펼쳤다. 건우는 모자 창을 뒤로 돌려 쓰고는 얇게 쪼개진 장작 하나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장작을 다른 손에는 라이터를 켜고 한참을 서있었지만 불씨는 도무지 타오를 생각을 안 했다.
"나무가 젖은 건가? 영 불이 안 붙네."
"못하겠으면 좀 나와줄래."
주영은 대뜸 건우 앞에 서더니 장작더미가 든 박스를 그대로 엎어 버렸다.
"뭐야?"
"못하겠으면 보고 배워."
주영은 북북 박스를 찢어 손바닥에 착착 쳐대고는 장작더미 사이사이로 꽂아 넣었다. 그리곤 도화선처럼 삐죽 튀어나온 종이 조각 앞에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종이 붙은 불은 순식간에 장작더미로 번졌다.
해가 지고 막 쌀쌀해지려는 찰나 모닥불은 포근한 열기를 뿜으며 주홍빛으로 주위를 밝혔다. 머쓱해진 건우는 머리를 긁적였고, 우린 맥주를 나주서 마시며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이틀 동안 너무 많은 걸 한 것 같다고 한나가 말하자 주영은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며 아쉬움을 성토했다.
"잠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은설이 외쳤다. 은설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원을 가로질러 게르 쪽으로 달렸다. 우리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불가에 남아 있는데 잠시 후 윤설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흰 봉지 하나를 흔들며 돌아왔다.
"이럴 줄 알고 챙겨 놨지."
봉지에는 하얗고 파랗고 빨간 마시멜로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제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챙기는 걸 봤는데 모닥불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보다.
건우는 '와우'라며 걸쭉한 감탄사를 한번 뿜었다. 대뜸 팔을 걷어 부치고 나무젓가락에 마시멜로를 꽂아 하나씩 돌렸다. 모두들 마시멜로 꼬치를 손에 들고 모닥불 주위로 모여들었다.
"당 충전 필요하면 이렇게도 먹어봐."
한나는 보온병에 챙겨 온 핫초콜릿에 연갈색으로 녹은 마시멜로를 담그며 말했다. 진한 코코아 향이 달근하게 탄 설탕향과 어우러지며 군침을 돌게 했다. 냄새만으로도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은설은 핫초콜릿을 입술에 반쯤 머금은 채 깔깔거리며 버기 집에서 먹은 볶음밥 얘기를 했고, 건우는 맥주를 한 캔 들이켜고는 마시멜로를 완벽히 구워보겠다 결심한 듯 꼬치를 불 속에 넣다 뺏다 하며 공을 들였다.
모두들 웃고 떠드는 사이 나는 조용히 일어나 한 발치 뒤로 빠졌다. 불빛에서 멀어지자 어둠이 서서히 시야를 덮었다. 그리고 다시, 하늘 위에서 쏟아지듯 별들이 나타났다. 모닥불에서 멀어지고 시야가 어둠에 잠식될수록 별빛은 강렬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선명한 별의 띠가 밤하늘을 가르는 모습이 나타났다.
혼자가 된 순간, 풍경은 깊어졌다.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희미해지자 우주가 얼굴을 드러냈다. 불빛에서 멀어질수록 별빛은 더 또렷하고 풍성해졌다. 하나의 문은 닫혔지만 정적과 침묵이 열어주는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나 홀로 조용히 그 세계의 모습을 담았다.
"오빠 뭐해요? 그만 찍고 와서 좀 먹어요."
윤설이 내가 서있던 곳까지 뛰어와 말했다.
"저기 좀 봐."
난 손을 뻗어 모닥불 쪽을 가리켰다. 윤설은 모닥불과 은하수 풍경을 보며 '와'하고 감탄사를 뿜었다. 하지만 이내 내 손을 끌고 일행들 쪽으로 향했다. 모닥불이 꺼지기 전에 구워놓은 마시멜로 한 번 먹어보라며, 달고나 보다 맛있다며 열변을 토하면서 말이다.
모닥불에 다가 갈수록 시야는 좁아졌지만 무언가 따스함 속에 마음이 노곤해졌다. 울려 퍼지는 웃음과 수다 소리엔 별가루가 섞여 있었다. 시간은 느리다 못해 멈춰 버렸고 내 마음은 어딘가 무중력의 이 세계를 유영했다.
한들거리는 불꽃에는 인간의 본능과 기억 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신비로움 힘이 숨겨져 있었다. 따뜻한 불빛 아래 몸은 노곤해졌고, 시선이 모이고 숨소리가 하나로 섞였다.
불빛은 서로의 얼굴을 은은히 비추고 그림자를 바람에 흔들리게 하며 이야기를 부르는 공간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마음을 드러내고, 상상의 세계를 풀어놓으며 꿈과 두려움을 나눴다. 불빛 속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바라보고 나와 다른 존재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은 고대부터 내려온 공동체의 기억이자 마음의 등불이었다.
아쉽게도 모닥불은 2시간을 채 못 버텼다. 장작만 더 있었더라면 밤새도록 있고 싶었지만 내일을 위해 참아야 했다.
바지에 뭍은 흙먼지를 훌훌 털어내며 정리하는데 게르 옆 벌판에 떡하니 세워진 푸르공 한 대가 보였다. 버기가 차를 정비를 한다며 외곽에 세워 났던 것이다. 은하수는 마침 푸르공 위로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린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푸르공 지붕에 올라앉아 몽골 여행자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상상해 봤을 풍경을 담았다.
모닥불빛의 여운이 은하수 별빛이 되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