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양작, 끝없이 펼쳐지는 붉은 땅

by 성세윤

먼지를 뿌옇게 흩날리며 한참을 달렸다. 오후 느지막이 도착한 곳은 불타는 절벽이라 불리는 바양작. 이름 그대로 주홍빛 사암 절벽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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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양작은 수천만 년 전 고대 바다가 남긴 퇴적층이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쳐 지금의 붉은 협곡으로 드러난 곳이라고 한다.

사암, 실트스톤 그리고 머드스톤이 각각 층을 이루며 쌓여 있어 절벽 자체가 시간의 흔적이었다.

세계 최초로 공룡 알 화석이 발견됐고 지금도 세계적인 공룡 화석 산지 중 하나라고 하니 생명의 역사를 담고 있기도 했다.

비탈길을 오르자 곧게 뻗은 능선 좌우로 수갈래 협곡이 펼쳐졌다. 마치 등뼈에서 뻗어 나온 갈비뼈인 듯 말이다. 위에서 내려보면 사막 위로 쓰러진 붉은 공룡의 척추처럼 보일 것 같았다.

바람이 골짜기를 타고 흐르자 갈래진 협곡 사이사이로 숨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고대 괴수의 몸체에 붙은 작은 미생물처럼 하잘것없는 존재가 됐다. 거대한 지질의 해부도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멋들어진 절경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오는데 윤설이 겁도 없이 절벽 끝으로 달려가더니 나에게 눈짓을 했다. 뭐야,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사막과 초원과 협곡과 어우러진 그녀 모습을 담았다.

뒤따라 주영과 건우도 절벽 위에 섰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사진기사가 돼버린 나였지만 그룹 내 내 역할이 있다는 게 묘한 안도감을 줬다. 건우나 윤설처럼 수다를 잘 떠는 것도 아니고 주영이나 한나처럼 일정을 잘 챙기거나 미정처럼 살뜰한 것도 아니라 이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건 다행이었다.


"형님, 이 버튼만 누르면 되는 거죠?"

건우가 나를 찍어주겠다며 나섰다.

"저도 오빠 사진 꽤 찍었어요."

카메라를 들고 있던 윤설도 끼어들었다. 나중에 보니 사실 내 사진이 제일 많았다. 내가 누군가를 찍어주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이 모두 사진 찍는 내 모습을 찍어주었으니 말이다.

혼자라면 셀카 몇 장, 그것도 지극히 제한적인 구도로만 찍었을 텐데 함께 돌아다니니 내 모습 또한 다양하게 찍혔다. 역시나 자신의 모습은 타인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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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곡 왼편으로 기울어지는 해를 보며 일몰 때가 되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 봤다. 척추 같은 능선에 금빛이 스미고 절벽의 음영이 깊어지면 붉은 고대 수왕이 잠에서 깨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일몰까지 있을 수는 없었다. 숙소에서 뷔페식 저녁을 주는데 늦으면 밥 먹을 곳이 없다며 소미가 우리를 재촉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야 일몰을 보고 밥은 라면과 맥주로 때워도 됐지만 식사시간이 끝나면 소미와 버기까지 밥을 못 먹기 때문에 마냥 우리 입장만 생각할 순 없었다.


숙소는 바양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게르 캠프였다. 게르에 짐을 풀고 식당을 향하려는데 하늘이 그제야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도저히 식당으로 발걸음이 내디뎌지지 않았다.

"먼저 가라. 안 되겠다."

"형, 또 사진 찍게요?"

"하늘이 저런데 안 찍을 수가 없지."

건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제에 이어 이틀째 저녁을 안 먹겠다고 하고 있으니 이해가 안 갈 법도 했다. 하지만 단 하루라도 그냥 놓칠 순 없었다.

일단 발걸음을 돌리고 난 후엔 바로 뛰기 시작했다. 몽골은 이상하게 해가 저무는 느낌이 들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나 산이 없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위도가 높아서 그런 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곧 하늘이 붉어지며 게르 뒤편으로 낮게 깔려있던 구름들도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해가 게르 꼭대기에 덩그러니 걸렸다. 야생화로 가득한 초원에 금빛 물결이 출렁였다. 숨이 막힐 듯 벅찬 풍경이 한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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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모습을 담으려 계속 한 방향만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봤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끄트머리에 작지만 선명한 불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양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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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불타는 석양빛이 척추 같은 능선에 맺혀 불꽃처럼 타올랐다. 검붉은 명암이 절벽을 타고 흐르며 거대한 짐승이 마지막 숨결을 토해내는 듯 묵직하게 세상의 끝을 장식했다. 심장이 무언가에 쿡 찔린 듯 아려왔다.

눈앞에서 저 모습을 놓치다니! 30분만 더 머물렀더라면.

저 풍경을 멀리서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아마도 내 생애에 두 번 다시 못 볼 풍경일 텐데 말이다. 협곡 앞에 세워진 차들을 보며 내가 저 앞에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했다. 그리고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벌써 절반 이상 구름 밑으로 숨어든 해가 시야에 들어왔다. 급히 카메라를 돌려 화각을 잡는데 초점을 맞출 새도 없이 해가 훅 꺼져버렸다. 마치 구름과 닿는 순간 미끄러져버린 듯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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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나 언덕이 있다면 태양이 천천히 가려지면서 사라지지만 지평선이 완전히 평평한 초원에선 몇 분만 지나도 해가 떨어지는 각도가 크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바양작도 마법은 이제 끝났다는 듯 불길을 거두고 어두운 적갈색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황혼이 내려앉은 초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해는 몸을 숨겼지만 하늘은 아직 식지 못한 불덩이처럼 진홍빛으로 타올랐고, 그 아래 끝없이 펼쳐진 초원은 어둠을 예비하며 고요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초원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한 여인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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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지? 주영인가? 그녀의 머리칼은 바람에 흩날렸고, 그녀는 바람을 앞질러 끌고 가듯 그렇게 초원을 가로질렀다. 초원의 숨결과 저녁의 서늘함이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흔들렸고, 무언가 싱그러운 젊음의 기운이 몸 밖으로 흘러나와 바람이 되어 흘러가는 듯했다. 끝없는 평원 위에서, 그녀는 작고도 유일한 불꽃럼 빛났다.


"형!"

순간 건우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고개를 드니 식당 앞에서 손을 흔드는 건우 모습이 보였다. 아직 식사 시간이 남았으니 다 찍었으면 빨리 와서 먹으라는 얘기였다.

"오빠는 모닥불 어때요? 의견 좀 주세요."

의자에 앉는데 미정이 물었다. $20불이면 모닥불을 신청할 수 있는데 할지 말지 논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겨우 $20불인데 굳이 의견을 나눌 필요가 있나 싶어서였다.

"뭘 그런 걸로 고민을 해. 내가 낼까?"

"아니요, 회비로 내면 되긴 해요."

회비도 있는데 왜 물어 본거지? 미정은 내가 눈썹을 추켜올리는 걸 눈치챘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흐흐 오빠가 또 사진 찍는다고 사라지실까 봐요. 회비는 같이 쓰는 돈인데 오빠 안 하시면 따로 걷으려고 했죠."

아차 싶었다. 사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일주일 내내 붙어 있어야 하는데 불편함은 불가피했다. 한국에서 겨우 한 번 만났을 뿐이고, 다들 과거의 삶도 현재의 삶도 다르니 말이다. 누군가 마뜩잖아할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 했고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일정과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논의하는 것이었다. 미정은 자신이 조금 불편함으로써 서로가 불편할 상황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미정은 불편함이 없도록 뒤에서 숨은 노력을 많이 하고 있었다. 내가 어제 윤설과 일몰을 찍으러 갔을 때 뷔페식으로 나왔던 음식을 한 접시씩 담아놓고 기다렸던 것도 미정이었다.

'나와는 많이 다르구나.'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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