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식사를 마친 우린 게르 주위를 맴돌며 버기 가족이 키우는 가축들과 게르 주위를 구경했다. 게르 뒤로는 커다란 원형 울타리 안에 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있었고 앞쪽에는 염소 떼가 한 무리 방목되어 있었다.
그때 멀리 초원 한복판에 놓인 의자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 의자에 앉아 노을을 보면 어떨까? 사방이 트인 광활한 초원에 홀로 놓인 의자에 앉아서 보게 될 풍경을 상상해 봤다. 바람소리에 풀잎이 바스락 거리고 그 위로 금빛 물결이 출렁이는 광경을. 누구라도 쇼펜하우어나 니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의자 위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그려 넣었다. 이거야 말로 낭만의 정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은설도 의자를 봤는지 멀리서 의자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제저녁 은설과 함께 봤던 노을 풍경이 떠올랐다. 저 의자에 앉으면 매일 그런 풍경이 보이지 않을까? 붉은빛으로 수놓이는 하늘과 비단결처럼 출렁이는 풀잎의 파도라면 매일 봐도 설레지 않을까? 노을 위로 가볍게 걷고 있는 은설의 실루엣이 비치는 듯했다.
순간 은설이 의자 앞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자지러지듯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 카메라를 들고 뛰어갔다. 몇 발짝도 채 가기 전 보게 된 건 킥킥거리며 웃고 있는 은설의 모습이었다.
뭐지? 상황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의자 쪽으로 돌린 순간, 나 역시 다리에 힘이 풀리며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곤 배꼽을 잡으며 웃음보를 터트렸다.
의자는 판 한가운데가 U자 형태로 뚫려 있었고 밑으로는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의자 위로 올리면 <볼 일 보는 사람>으로 작품명을 바꿔야 할 참이었다.
생리적 본능을 해결하기 위한 소박한 장치를 보며 난 도대체 무슨 상상을 했던 걸까? 집밥 한 끼 같이 먹었다고 타인의 생활 방식을 이해하고 교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오만일 뿐이었다.
윤설은 크게 한바탕 웃고 난 뒤 일행들에게 의자의 용도가 뭔지 퀴즈를 내겠다며 달려갔고 난 의자 앞에 홀로 남게 됐다. 웃음이 그친 자리엔 이상한 적막이 감돌았다. 무언가 커다란 간극이 느껴졌고 그로 인한 충격이 묵직하게 전신을 감쌌다.
"오빠!"
멀리 염소 우리 근처에 일행들과 서있던 주영이 나를 불렀다. 버기 아내가 염소 젖자 주겠다며 모두를 불렀다고 한다.
버기 아내는 쪼그려 앉아 파란 양동이를 하나 대고 능숙한 손놀림을 염소 젖을 짜냈다. 젖은 하얀 줄기로 뿜어져 나오며 양동이에 고였고, 그 고요한 소리는 쓸쓸한 노동요처럼 들렸다.
윤설과 나는 울타리 근처에 서서 버기 아내가 착유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런데 아무리 찍어봐도 내가 보고 있는 풍경과 인물을 포착할 수 없었다. 프레임은 어딘가 비어 있었고, 삶의 무게는 희미해져 버렸다.
순간 윤설이 울타리를 열고 버기 아내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그녀는 흠칫 놀랬지만 윤설이 뭐라고 소곤거리자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윤설은 그대로 자세를 고정한 채 연신 셔터를 눌렀다. 윤설의 카메라 LCD에 뜨는 사진들을 힐끗 쳐다봤다. 화면엔 버기 아내의 손길과 주름, 그리고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단순한 장면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버텨낸 유목 생활의 무게가 배어났다.
고작 한 발짝 다가섰을 뿐인데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나?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난 끝내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울타리는 어떤 무한수렴하는 함수의 경곗값인 것 같았다. 그리고 울타리 밖에 서서 담아낸 모습이란 평이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내 사진들은 내 자화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나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다. 울란바토르에서 K팝 공연을 보고 게르촌에서 공동묘지를 봤을 때, 어제 오토바이를 탄 아저씨를 볼 때도 그랬다. 나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었다.
경계는 농밀한 막이 되어 내 시각과 후각과 촉각을 틀어막았다. 한꺼번에 토해낸 구토처럼 끈적하고 눅진하게 나를 속박했다.
그렇게 '나'안에 갇혀 있는 내가 어떻게 어떻게 타인과 그리고 세상과 교감할 수 있을까? 구토가 식도를 타고 내려와 심장 한가운데를 턱 하고 틀어막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을 틀어 아무도 없는 초원을 향해 몇 발짝 걸었다. 유록빛 바람이 가슴속으로 흘러들었고 그제야 비로소 숨이 트였다. 하지만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경계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이 느껴졌다. 잠시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인 그 경계가 언제고 다시 나타나 내 숨통을 조여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