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고요와 붉은 태양을 온전히 맞이하고 나니 어느새 아침 식사 시간이 됐다. 모두들 졸린 눈을 비비며 식당에 모여들었다. 나는 별사진을 찍은 후 일찍 잤지만 나머지 일행들은 주영이네 게르로 들어가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 하니 피곤할 만했다.
건우는 말라붙은 빵을 입에 넣고 소가 여물 먹듯 우물거렸고, 윤설은 눈을 반쯤 감은 채 기계처럼 시리얼을 입에 밀어 넣었다. 양손으로 접시를 쥔 채 좀비처럼 뷔페 테이블을 돌고 있는 미정도 잠에서 깨려면 커피 몇 잔은 들이켜야 할 것 같았다.
"다들 괜찮으세요?"
일찌감치 출발 준비를 마친 듯 커다란 차양막이 달린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챙긴 소미가 식당에 들어서며 물었다. 주영은 고개만 끄덕이며 답을 대신했다. 소미는 커피 한잔을 받아 들고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앉았다.
그날 일정은 붉은 협곡이라 불리는 바양작이었다. 숙소에서 거리는 150km 정도라는데 대부분 비포장 도로라 반나절 정도 가야 한다며 설명해 줬다. 그리고 점심은 보통 식당으로 가지만 마침 버기 집이 가는 길에 있으니 거기서 먹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기사님 집이요? 실제로 사는 집?"
한나는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눈을 치뜨며 물었다.
"네. 기사님, 집. 가는 길에 있어요. 그래서 거기로, 갈 수 있어요."
소미는 특유의 말투로 또박또박 답했다.
"와. 그럼 게르도 있겠네요."
"맞아요. 기사님, 가족은 게르에, 살아요. 그래서 우리가, 거기에, 가는 거예요. 점심을, 게르에서, 먹을 거예요."
"대박. 완전 현장체험이네. 재밌겠다."
윤설은 두 눈을 반짝였다.
게르와 유목민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며 다소 활기가 돌았다. 그제야 모두들 잠에서 깨어난 듯했고 활기는 푸르공에 올라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내내 몽골 첫날밤과 은하수에 대한 수다로 피어났다.
끝없이 초원이 펼쳐졌다. 멀리 깨알처럼 흩어진 양 떼와 간간이 보이는 게르만이 누군가 이 광활한 대지에서 삶을 일구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푸른 초원 사이로 희미하게 이어진 두 줄의 자갈길을 따라 그런 생각들이 이어졌다.
한참을 달리고 노곤함이 밀려올 때쯤, 멀리 초록색 창고와 그 옆에 세워진 게르 두 채가 보였다.
조수석에 있던 소미가 싱긋 웃으며 도착을 알렸다. 건우는 차 문이 열리자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손깍지를 끼고 팔을 뻗었다. 뒤따른 주영도 발끝을 곧게 뻗고 표지판처럼 몸을 곧게 세웠다. 버기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게르를 가리켰다. 끝없는 초원의 바다에 버기네 게르 한 채만 망망대해 위 부표처럼 떠 있었다.
버기 가족은 조부모부터 손자까지 모두 한 공동체로 유목 생활을 했다. 예전에는 게르 전체를 해체해 말에 싣고 움직였는데 버기 덕에 여유가 생겨 계절 별 목장마다 게르를 갖췄고, 그래서 이젠 푸르공을 타고 사람과 가축만 옮겨 다닌다고 한다.
우리가 들린 게르는 나무 뼈대에 얇은 펠트 천만 한 겹 씌운 여름 게르였다. 겉으로 보기엔 원형 천막이라 답답할 것 같았는데 상단에 통풍구 겸 채광창이 있어 생각보다 밝고 쾌적했다.
게르 한쪽에는 침대 위로 붉은색, 주황색, 청색 등 원색천으로 짠 쿠션과 담요가 놓여 있었고 중앙에는 거칠고 녹슨 철제 난로가 있었다. 그 반대편엔 작은 주방 겸 조리 공간이 보였다. 벽에는 조미료나 차통, 국자와 프라이팬 같은 도구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버기 할머니는 환한 웃음으로 우릴 반겼다. 윤설이 침대 곁으로 다가서자 할머니는 손녀딸 대하듯 윤설의 손을 쓰다듬으며 몽골어로 인사를 건넸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어감에서 온정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기 가족과 버기 형 가족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게르 안은 곧 점심 준비로 분주해졌다. 버기 아내가 달궈진 프라이팬에 다진 양고기를 양파, 당근과 함께 넣자 기름진 고기향이 진하게 퍼져 나왔다. 그녀는 거기에 밥을 넣고 굵은소금만 적당히 뿌려 고소하게 볶아냈다.
그사이 버기는 커다란 말통을 꺼내더니 국자로 휘휘 젓기 시작했다. 묽고 거품이 이는 하얀 액체를 한 국자 퍼올리자 시큼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아이라그!"
버기는 액체를 그릇에 담아 우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비위가 약한 나였지만 거절할 순 없어 일단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 꿀꺽 마시는데 너무 진하고 특이한 맛이나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처음엔 달콤 시큼한 요구르트와 옅은 탄산기의 막걸리 맛이 나다가 끝에는 희미한 소금기와 함께 고소한 맛이 났다. 익숙한 맛들이 음료 하나에 이렇듯 어우러지니 묘할 따름이었다.
홀짝홀짝 한 사발을 다 마시는 나를 보더니 소미가 그건 아이라그라는 말젖으로 만든 발효유로 식전에 환대의 표시로 내주는 음료라고 말해줬다.
곧이어 버기 아내가 양고기 볶음밥을 완성해 내놨다. 사실 양고기라면 딱히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볶음밥에 들어간 고기는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고, 양고기 특유의 노린내보다는 풀내음과 젖비린내에 가까운 육향이 났다.
버기는 음식에 만족해하는 우리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싱긋 웃음을 보였다. 오늘 아침에 잡아서 직접 피를 뽑고 손질한 고기라는데 무언가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초원을 뛰어다니던 생명력을 품고 있는 것이니 어찌 신선한 풍미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생명력을 매일 흡수하는 민족이니 어찌 당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단지 돈과 경제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민족성 같은 것이었다.
음료 하나와 식사 한 끼였을 뿐이었는데 무언가 부쩍 유목민 생활에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그저 가이드와 기사로 생각했던 소미와 버기도 사뭇 달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