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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퍼맘 May 22. 2024

우린 모두 각자의 삶에서 일루수다.

이슬아 작가의 <끝내주는 인생>을 읽다가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의 한 구절에 관한 언급에 잠시 머문다.


영화 <머니볼>에서 타자인 저스티스가 일루수인 해티버그에게 묻는다.


"뭐가 제일 겁나?"

"공이 내 쪽으로 오는 거." 


저스티스는 장난치지 말고 진짜로 말해보라했다. 해티버그가 웃음기 없이 못 박는다. 농담 아니며 진짜라고.


이 말에 정희진 선생도 이슬아 작가도 울었다 한다.


'그러니까 감당이 안 된다는 거잖아요', 정희진 선생의 해석이다. 


야구공이 제일 많이 가는 쪽이 일루수이다. 막상 홈 그라운드 바로 앞, 더 중요해보이는 삼루쪽으로는 공이 잘 가지 않는다. 수천, 수만 관중이 지켜보고 있는 일루수인데, 자신에게 공이 날라올까 두렵다는 건, 자신이 하는 일이 감당이 안된다는 거 아니냐, 하며 정희진 선생과 이슬아 작가 둘 다 울었단다. 그리고 이 언급에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도 그러했던 적이 있는데. 감당이 안 되는 장소와 순간에서 피하지도 못하고 그 일루를 지킨 적 있었는데.


나는 그렇다쳐도 유명 작가 정희진 선생과 이슬아 작가는 왜 우는가.


그 당시 나는 내가 감당이 안되는 장소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희진 선생과 이슬아 작가또한 그러했으니, 그래서 이 대사 한마디에 눈물을 흘린 게 아닐까.


당시에는 몰랐으나 언제 알게 되느냐 하면.


사회인 야구 일루수도 거뜬히 잡았을 공을 TV 에 매일 나오는 프로 선수가 어이없게 놓치는 실책을 하기 전까지. 그 실책이 관중들에게 꽤 큰 비난의 목소리로 선수의 귀에 들리기 전까지.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던 내 팬들이, 그 날 그 딱 한번의 실수로 야유로 바뀐 소리가 몇날 며칠 귀에 맴돌기 전까지. 그 다음 경기에 또 같은 실수를 할까봐 마음 속으로 제발 공이 내 쪽으로 날아오지 않길 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그래서 <머니볼>의 해티버그처럼 공이 내 쪽으로 오는 것에 제일 두렵다는 생각을 할때. 그제서야 우리는 어쩌면 나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구나, 알지 않을까.


이슬아 작가는 이렇게 언급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생을 감당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알고 보면 모두 각자의 삶에서 일루수다." 


그렇다. 모두 다 오늘 하루를 각자의 장소에서 어떻게든 감당해보려 눈 똑바로 뜨고 글러브 단단히 끼고 일루에 버텨 서 있는 거다. 


감당이 안되어도 어쩌겠는가. 일루수로 훈련 받은 세월이 얼마인데 내려오겠는가, 아님 외야로 교체해달라 감독에게 부탁을 하겠는가. 몸이 아파도 덜 아픈 척, 마음이 아파도 멀쩡한 척, 나에게 날라오는 공 따위야 거뜬히 잡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내 자리에 서야지.


그러다보면 언젠가 그 일루에서 영원히 내려올 날이 있겠지. 두렵다고 금방 포기하지 않고, 두려운 순간에도 잡기 힘들었던 공 숱하게 잡아냈던 내 자신에게 수고했다, 장하다, 자랑스럽다, 는 말을 건내는 날이 오겠지. 이제는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그 때 그 머리 쭈삣했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날이 오겠지.


그 날에 미련은 남지 않게 오늘도 각자의 삶에서 일루수로 잘 버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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