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로벨리의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15년 전쯤 한국에서 엄청나게 유행한 책이 있다. 론다 번의 <시크릿>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긍정적인 생각과 끌어당김의 법칙을 통해 원하는 삶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이것을 들었을 때, 너무 비과학적이고 허무맹랑한 소리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쯤은 내가 기독교 바탕의 우주관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우주의 만물은 전능한 신에 의해 운영되고, 신이 우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따라 미래가 정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인간 따위가 어떻게 원하는 삶을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인생을 정해져 있다. 그것은 내가 정한 게 아니다. 신이 정했다.
그러던 내 우주관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교회에서 벗어나보니, 내 선택에 자유로움이 생겼다. 그리고 이전에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중에 가장 큰 변화는 아무래도 일이다. 나는 인스타그램 강의라고 하는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을 시도했고 지금은 그것이 주업이 됐다.
이전에는 재밌고 똑똑한 교회 형, 미학에 대해서 재미있게 풀어내는 글쓴이였다면 지금은 오히려 13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가진 인스타그램 전문가라고 인식된다. 나의 우주가 바뀐 것이다. 그것조차 신이 계획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에는 지나치게 서사 없이 빠르게 바뀌어버렸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내 우주를 창조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신성모독이 제일 재밌고, 예술에서든 과학에서든 역사를 만든다)
그중에 하나가 달리기다. 2024년이 시작하면서 나는 장거리를 달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내 인생의 장거리 달리기는 군대에서 뛰어본 아침 구보 3km가 전부다. 나는 건강적인 측면에서 수치로 증명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한 번 시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달리기다. 달리기만큼 수치적으로 나의 성장이 증명되기 쉬운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나 하프 마라톤에 나갈 거야". 이상하게도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부정적인 사람들이 없다. "어, 그래? 그럼 나도 할래" 그렇게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10여 명의 친구들이 함께 달리기를 하는 크루가 생겼다.
그중에는 이미 풀코스 마라톤을 경험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 친구들을 어쩌다 보니 내가 모은 겪이 돼서 매주 달리기 모임을 했고, 대회를 신청했다. 그리고 오래 3월 너무나도 이르게 하프마라톤을 뛰어버렸다. 한 해의 목표가 너무 빨리 달성되어 버려서, 또 다른 하프 마라톤도 신청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풀코스도 뛰어보자. 그렇게 올 한 해, 2번의 풀코스 마라톤과 3번의 하프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모두 완주를 했다.
내 인생이 내가 마음먹은 대로 창조된 것이다. 그렇게 모아 온 메달들을 바라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야 이거....? 끌어당김의 법칙 진짜 맞는 거 아냐?'
올해 5월 미국에서 사업가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어서 참여하게 된다. 장거리 여행이기에 비행기에서 독서를 하자는 마음에 집어든 책이 바로 카를로 로벨리의 책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이 책은 양자 물리학자가 바라보는 인간의 존재를 탐구한 책이다. 책의 핵심 내용은 인간의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항상 관계와 상관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론만 듣고 나면 진짜 재미없고, 지루할 법한 책이다. 나에게는 이 책이 굉장히 재밌었다. 읽는 내내 안 그래도 책이 작은 사이즈인데, 빨리 끝나버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말하는 핵심이 내가 직접 겪은 우주관의 변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는 양자론에는 3가지의 주요 핵심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입자성, 관찰, 확률이다. 가장 먼저 입자성은 우주의 모든 것들은 입자로 이뤄져 있다는 말이다. 이 입자는 내가 관찰할 때에만 그것이 인식 가능하다. 이것이 관찰이다. 하지만 이 입자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내가 관찰한 것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여겨진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 또는, 메타버스와 같다.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지만, 밖에 나가서 친구를 만날 수도 있고, 밥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것을 선택했고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행동은 글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입자들이 관찰될 확률은 관계성과 관련이 있다. 당신이 이 브런치 글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브런치라는 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당신의 이전 행동들에 의해서 알고리즘이 이 글을 당신에게 추천해 줬다. 또는 나의 지인이거나 구독자일수도 있다. 즉 이 글을 읽게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존재들과의 사건에 의해서 당신은 이 글을 읽고 있다. 입자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상관에 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자(우주의 모든 것)를 관찰하기 시작하고, 내가 원하는 확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그와 관련된 존재와 상관을 맺으면 우리가 바라보는 결과는 뒤바뀐다. 정해져 있는 미래 따위는 없다.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한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서, 10년 후가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라고 말한 것, 플라톤이 이야기 한 "존재는 작용이다"가 이와 같은 맥락이다. 나의 삶은 내가 무엇을 관찰하고, 어떤 존재와 상관성을 가지느냐에 따라 따라 달라진다.
우연하게 마라톤을 뛰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라고 말하지만, 사실 내가 마라톤을 뛰겠다는 생각은 다른 일들에 의한 작용이다. 나는 내 삶에 4가지 분야에서의 밸런스와 성장을 중요시한다. 경제, 건강, 관계, 지식이 그것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건강이다. 2023년 건강에서의 성장을 경험하고 싶었고 이 때문에 숫자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본 것이 기록 운동이다. 기록운동은 점점 더 성장할 수 있다. 특히나 마라톤은 5km, 10km, 하프, 풀코스 등으로 성장을 숫자로 증명하기에 탁월했다.
그렇게 마라톤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마라톤과 관련된 것들이 귀에 들어오고, 그것들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와 마라톤 대회를 2개 같이 나가고, 몇 달간 함께 훈련한 A를 만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마라톤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당시 누군가가 A가 풀코스 마라톤을 뛰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나 A를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A를 만나서 풀코스 마라톤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그리고 직접 뛰어보면 어떤지 등등에 대해서 물어봐야겠다고 상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지인의 생일파티 때 A가 참석했다. 나는 A에게 너무 만나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실 A는 이커머스에서 굉장히 유명한 인플루언서다. 어린 나이에 이커머스 업체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강의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유명해졌다. 그런 사람에게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마라톤이었다. 재미있게도 A도 자신에게 마라톤을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는지 내 질문에 관심을 갖고 신나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러닝크루를 결성했다.
마라톤을 관찰하기 시작하자 내 주변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유튜브에서 마라톤에 대한 영상을 찾아보고, 알고리즘은 나에게 마라톤 영상을 추천해 준다. 신발이나 옷들도 마라톤과 관련된 제품들을 찾아보고 구매했다. 그러자 쇼핑몰들에서 나에게 마라톤에 대한 광고를 계속 보여준다. 마라톤과 전려 상관없는 모임에 가서도 마라톤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 쉽게 친해지고, 대화를 하기 더 편해졌다. 어느 순간 나의 존재에 대한 정의에 마라톤이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그리고 마라톤 실력도 늘었다. 처음에는 5km를 뛰는 것도 숨이 차고 힘들었다. 10km를 처음 뛴 다음날에는 근육통 때문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몇 번을 달리고 나니, 10km를 달려도 몸에 아무 무리가 없었다. 하프 마라톤을 처음 달렸을 때는 10km를 처음 달렸던 다음날처럼 온몸에 고통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21km를 달려도 멀쩡하다. 그리고 풀코스 마라톤을 2번이나 완주했다.
마라톤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과 관련된 환경들이 조성되고, 사람들이 모아졌다. 내 인생에는 없을 것 같던 마라톤이 어느 순간 자리 잡았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 눈으로 본 것들이 인간의 뇌로 들어간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완전히 반대로 움직인다. 뇌는 이전에 일어난 일과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무언가가 보일 거라고 예상한다. 뇌는 눈에 보일 것을 예상해서 그것을 눈에 전달한다. 이 상황에서 뇌가 보낸 신호와 눈이 받아들인 신호가 불일치할 경우에만 정보가 전달된다.
이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것을 보면 그것을 이전에 알고 있던 상과 매치시키려고 하는 습관이 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 구름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 저 구름 강아지 닮았다" 그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강아지 상과 구름을 일치시킨 결과다. 하지만 자세히 그 구름을 '관찰'해보자. 정말 그 구름이 강아지와 모습이 같은가? 아닐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보는 것과 세상과의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는 자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세상의 이미지를 먼저 만든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을 일치시키려고 한다. 그것에서 불일치가 일어나면 우리는 선택한다. 그것을 '관찰'할지, 아니면 그냥 이전의 나의 경험과 앎의 영역 안에서 해석하고 그대로 둘 지.
아마도 이전까지 내 인생에 달리기가 없었던 이유는 내가 겪었던 경험과 지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달리기는 힘이 들고, 지루하다는 편견이 있었다. 마라톤을 뛰는 것은 굉장히 높은 정신력과 체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전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 예측을 제거하고 '관찰'해보니 마라톤은 내가 즐길 수 있는 스포츠였고, 관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전에는 없던 마라톤이 어느덧 내 삶에 자리 잡았다.
우리의 인생에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는 새로운 일을 마주할 때, 항상 이전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모든 것을 예측한다. '저것은 힘들 거야', '저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그런 거 하는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그것들을 제대로 '관찰'해보면 그것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내가 알고 있었던 것만큼 두려워할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 자신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정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존재는 이러이러한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어떤 것을 관찰하는가에 따라 나의 존재는 다르게 규정될 수 있다. 우리의 존재는 신에 의해 규정되지도 않았고, 이전의 경험과 사회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다. 내 인생에 달리기는 없을 줄 알았지만, 지금은 달리기가 내 인생의 일부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