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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는 재부팅이다

기본모드 네트워크와 재부팅

by 예술호근미학

인간의 뇌에는 기본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는 것이 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가는, 말하자면 뇌의 공회전 상태다. 문제는 이 기본모드가 우리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자책하는 반복적인 부정의 회로. 그것이 인간 뇌의 기본 설정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존재가 된다.


사업을 하다 보면 운영하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과 마주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매출 폭락, 경쟁자의 출현, 믿었던 직원의 배신이나 돌연한 퇴사. 내 잘못이 아닌데도 큰일이 터진다. 사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사업을 한다면 필수적으로 맞이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것이 내 일이 되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황하고,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여 제대로 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다.


작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때였다. 믿었던 직원이 몰래 클라이언트를 빼돌렸다. 한순간에 매출은 반 토막이 났고, 나는 직원도 잃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내가 무능해서 그렇다는 자책이 밀려왔고, 배신한 직원과 신의를 저버린 고객에 대한 원망이 뒤엉켜 가슴속에서 뜨겁게 타올랐다.


답답한 마음에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달렸다.


달리다 보니 숨이 찼다. 자연스럽게 내 호흡에 신경을 쓰게 됐다. 넘어질까 봐 지형을 살피고, 자세와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됐다. 그렇게 한 시간쯤 달리고 나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잦아들면서, 그 일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는 인정의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하는, 건설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달리기를 할 때는 전전두엽이 활성화되고, 운동 관련 네트워크와 감각 네트워크가 켜진다. 인간은 달릴 때 기본모드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모드의 뇌를 사용하게 된다. 모드가 바뀌는 순간, 반복되던 부정적 사고의 고리가 끊어지면서 문제를 감정이 아닌 이성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무거운 작업을 오래 돌리다 메모리가 부족해진 컴퓨터가 재부팅 후 다시 빨라지는 것처럼.


달리기 전에는 거대한 재앙처럼 느껴졌던 일들이, 달리고 난 뒤에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직원을 두면 매달 고정비가 나간다. 하지만 같은 일을 프리랜서에게 맡기면 실제 작업량만큼만 지불하면 된다. 클라이언트의 마케팅을 대행하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없고, 성과가 나오지 않을 때마다 압박감에 시달렸다. 게다가 결국 내 매출이 아니기에, 들이는 시간에 비해 돌아오는 것은 늘 부족했다.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 일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좋은 타이밍에 익절한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 시간을 부가가치가 더 높은 곳에 쓰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 것들을 실행에 옮겼고, 지금은 그때보다 나은 상황에 와 있다.


그 이후로 나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이 밀려올 때마다 운동화를 신고 문밖을 나선다. 기본모드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반복적인 부정의 회로를 끊고, 빠르게 다른 모드로 전환하기 위해서다.

모드가 바뀌고 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해결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한 번의 재부팅. 멈춰 있던 공회전을 끊고, 몸을 움직여 뇌의 스위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달리기는 나를 재부팅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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