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랑종>의 오프닝 숏에는 서사적인 의미가 없다. 영화가 시작하자 신비로운 숏들이 나온다. 안개 낀 장엄한 산맥, 거대한 석상, 무당이 쓰는 물건, 아무도 없는 논밭, 서사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 피사체.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분위기 있는 숏이 연달아 이어지다가 이야기가 뒤늦게 시작된다. 촬영팀이 바얀 신이 깃들어있다는 ‘님’이라는 무당과 인터뷰를 나누고, 그녀를 취재하기로 한다. 뜸들인 것에 비해 이야기는 간단하다. 그런데 특별한 서사가 없는 이 오프닝 시퀀스는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휘어잡는 중대한 암시다.
이 장면은 샤머니즘을 연상시키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쌓고 쌓아서 한껏 분위기를 잡아놓고, 그 분위기를 님에게 전이시킨다. 이제부터 관객은 무당인 님을 따라가야만 한다. 바얀 신이 깃들어있지 않은 우리가 신과 악령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촬영팀이 님과 인터뷰를 마치고 나면 태국의 산이 한 번 더 나온다. 익스트림 롱 숏으로 찍힌 산맥이 장관이다. 바람이 산맥을 휩쓸고 가는 소리가 들린다. 저 산을 휩쓸고 가는 바람을 누가 일으키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 숏을 마지막으로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랑종(무당)'이라는 제목이 화면을 채운다. 이것은 이 영화가 무당에 대한 이야기라는 선언이다. 이 선언은 앞으로 영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2.
오프닝 시퀀스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또 다른 질문을 해야겠다. 두 질문이 같은 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랑종>은 초반에 파운드 푸티지처럼 보이지 않는다. 파운드 푸티지는 촬영자가 행방불명이 되어 파묻혀 있던 영상이 발견되었다는 설정을 따른다. 관객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본다고 느낄 수 있도록 카메라맨의 존재를 노골적으로 부각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 덕분에 영화에 사실감이 느껴지는 대신, 전지적 시점에서 마음껏 구현할 수 있던 장르적 연출은 제한된다. 반면 <랑종>은 파운드 푸티지에서 나올 수 없는 장르적 연출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적재적소에 등장인물의 인터뷰가 나온다. “촬영팀은 밍에게 바얀 신이 빙의되는 과정을 찍기로 결정했다”라는 식으로 촬영팀의 코멘터리마저 들어가 있다.
초반에 <랑종>은 파운드 푸티지보다는 무당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나는 반종 피산다나쿤이 이런 형식을 선택한 것이 의아했다. 제작진의 코멘터리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그들이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영화를 편집했으리라는 뒷사정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스펜스를 형성하기 좋은 형식이 아니다. 종국에 촬영팀이 모두 죽고 영화가 파운드 푸티지라는 사실이 드러나는데도, 이 형식에 긴장감이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어차피 촬영팀이 죽는 장면이 나올 때쯤엔 관객은 촬영팀이 죽을 리가 없어 보이는 전반부를 본 상태다.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전반부를 파운드 푸티지가 아닌 것처럼 연출하는 것은 이상한 선택이다.
게다가 그것만이 이상한 게 아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로서 <랑종>을 보면 이상한 구석이 너무 많다. 밍네 이웃집 할머니가 의문사한 장면을 보자. 님이 수상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밍을 바라보는 시점 숏이 나온다. 이런 시점 숏은 다큐멘터리에 나올 법한 숏이 아니다. 밍이 프레임에 갑작스럽게 들어와 관객을 놀랠 때는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음향 효과가 나온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라고 가장하고 싶다면 이런 음향 효과를 넣어선 안 된다. 파운드 푸티지라면 이런 음향 효과를 넣는 게 이상하지 않다. 파운드 푸티지라면 제3자가 기이한 영상을 발견한 후 공포영화로 편집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촬영팀이 샤머니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다는 설정 하에는 이 음향효과가 허용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편집자가 공포영화를 편집한 것이 아니라 님이라는 무당과 그녀의 친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편집한 것이다.
<랑종>은 파운드 푸티지로 보아도,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보아도 이상하다. 밍을 관찰하기 위해 촬영팀이 일주일간 감시카메라를 설치한 대목을 보자. 이 장면 역시 파운드 푸티지라기엔 편집을 한 흔적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이번이 몇 일차인지 알리는 자막이 나온다. 밍이 서랍에서 기어 나오는 숏에는 밍을 강조하는 클로즈업이 들어간다. 이런 코멘터리나 클로즈업은 편집자의 관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전유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밍의 기행에 대한 자막이나 코멘터리만은 생략되어 있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라면 여자가 반려동물을 잡아먹는 충격적인 장면에는 제작진이나 관계자의 코멘터리가 들어가기 마련이다.
내가 이 장면에 주목한 것은 블로그 이웃인 HANMOVIE 님이 쓴 글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CCTV 화면에는 밍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와 성관계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이 장면은 충격적이다. 성관계라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CCTV 화면이 재현되는 방식이 충격적이다. 이 장면에서 CCTV 화면의 형식은 앞뒤 맥락을 지워버린다. 성관계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것이 아니라 인터뷰라는 현재 시점의 서사적 맥락이 완전히 소거되었다는 뜻이다. 꽤 충격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제작진과 사장, 가족과 퇴마사, 밍의 서사는 완전히 생략되고, CCTV 화면은 오로지 순간의 충격 효과에만 복무한다." (https://blog.naver.com/rmatjdwjdals/222434365170))
합당한 지적이다. <랑종>에는 이 영화가 진짜 다큐멘터리라면 무릇 들어가 있어야 할 장면들이 생략되어 있다. 이 영화는 파운드 푸티지라기엔 지나치게 편집이 많이 되어 있고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기엔 눈속임이 부족하다.
나는 단순히 흠을 잡기 위해서 이 영화의 형식을 논한 것이 아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왜 <랑종>이 이런 흠을 떠안고라도 페이크 다큐멘터리처럼 찍혔다가 파운드 푸티지임이 드러나는 형식을 필요로 했는가, 이다. 공포 장르에서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일반적으로 사실감을 위해서 선택하는 형식이며, 사실감을 위해서라면 영화 속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듯이 관객을 속여 넘길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상할 정도로 관객을 속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럼 반종 피산다나쿤은 왜 이런 형식을 선택했단 말인가?
3.
<랑종>이 믿을 대상을 줬다 뺏으면서 관객에게 절망감을 안겨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랑종>은 제작진에 의해 모든 상황이 통제된 채 무당이 악령과 맞서는 걸 취재한 영화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혔기 때문에 관객은 밍과 연관된 사람 모두가 죽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 힘들다. 밍의 가족이 전부 죽었다면 그녀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사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니라 뉴스가 다룰 일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전부 죽었다면 그들이 밍이나 님과 나눈 인터뷰가 다큐멘터리로 멀쩡하게 편집이 되어서 상영될 리가 없다. 그런데 지켜보고 있자니 일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무당 다큐멘터리처럼 시작한 영화가, 제작진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죽어 나가는 파운드 푸티지로서 끝난다. 관객은 이야기가 파국으로 치닫을수록 "이럴 리가 없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전개. 결국 악을 저지하려는 시도는 전부 무산되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랑종>은 <곡성>과 닮았다. 인간이 아무리 저항을 해도 악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두 영화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곡성>은 사건의 자초지종이 흩트려진 영화다. 누가 악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가 확실하지 않다. 반면 <랑종>은 중반까지 모든 것이 극명해 보이는 영화다. 무당이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무당은 영화를 장악하는 듯이 보인다. 님은 모두가 밍에게 바얀 신이 깃든다고 믿을 때 가장 먼저 밍에게 깃든 영혼이 바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중반에 밍이 집을 나갔을 때는 님이 직접 나서서 밍을 찾기도 한다. 님은 사촌 오빠인 맥이 밍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맥을 설득하기 위해 의식을 행한다. 그러다 깨진 계란에서 검은 물이 나온 것을 본다. 님은 검은 물을 보고 "모든 게 분명해졌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말로 폐공장에서 밍을 찾아낸다. 계란에서 검은 물이 나온 것이 왜 맥이 악귀가 아니라는 것을 상징하는가? 나는 그 답을 모른다. 내가 '랑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의 논리를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반면 님에게는 무언가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는 듯 보인다.
다시 오프닝 시퀀스를 언급할 차례다. 나는 첫 문단에서 오프닝 시퀀스가 영화 전반을 휘어잡는 중대한 암시라고 말했다. 이 장면이 악에 대항하는 '랑종'이라는 세력을 인상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밍의 상태가 악화되는 와중에도 님은 언니에게 "모든 건 통제 안에 있다", "나에게만 맡겨라"라고 말한다. 러닝타임 도중에는 바얀 신의 영험함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장엄한 산이 인서트 된다. 이 인서트 숏은 서사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지만, 무당의 영향력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랑종>에는 끊임없이 정글 인서트 숏이 나온다. 예수님 상이, 부처님 상이, 바얀신 상이, 분위기 있는 산맥이 인서트 된다. 그래서 <곡성>과는 달리 초중반까지만 해도 바얀 신 세력이 통제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바얀 신이 있는 것이 맞냐는 언니의 질문에 님은 "나는 분명히 바얀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전혀 생각도 못 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전반부에는 인터뷰가 곁들어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세히 설명이 되지만 후반엔 상황에 대한 조망이 전혀 없다. 어느새 영화는 전형적인 파운드 푸티지처럼 되어있다. 통제권을 잃어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간간이 산이 분위기 있게 인서트 된 숏이 있었지만 인서트 숏은 어느 시점부터 나오지 않는다. 무당과 신이 서사에 대한 장악력을 잃어가면서 중간중간 삽입되던 신비스러운 숏도 사라지는 것이다. 희망을 줬다가 철저하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님은 사건의 원리를 분명하게 파악한 것 같았다. 님이 말하는 대로 잡귀들이 밍에게 들어간 거 같고, 아싼티야 공장의 피해자들이 복수를 하는 것 같고, 실력 없는 종교인이 굿을 잘못했다가 상황이 악화되는 것 같았다. 님만은 확신을 갖고 행동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엔딩에서 님은 어떤 말을 하는가?
4.
"저는 한 번도 바얀 신의 존재를 확신해본 적이 없어요."
님마저도 바얀 신의 존재를 확신한 적이 없다면, 그녀가 지금까지 했던 말은 뭐였던 걸까. 그녀가 한 말이 맞긴 했던 걸까. 그럼 밍에게 깃든 존재는 애당초 무엇인가? <랑종>의 엔딩은 우리가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질문을 무용하게 만든다. 악을 타개할 방법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인물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마지막 발버둥으로서 신을 찾는다.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 초월적인 존재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도 부처도 밍의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바얀 신 상은 목이 잘렸다. 가장 믿음직했던 님은 죽었다. 그나마 살아있던 무당도 떨어져 죽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님의 언니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물론 그녀조차 악에게 패배한다.
<랑종>의 공포는 코즈믹 호러에 가깝다. 일이 단단히 잘못되어간다는 감각,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무력감과 비참함. 이 영화는 관객에게 서사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거대한 절망감을 안겨준다. 모든 장면이 절망감을 위해 있다. 개가 죽는 장면이나 아기가 죽는 장면은 카메라에 직접적으로 찍히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존재가 극악무도한 짓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자극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밍이 섹스를 하는 장면 역시 멀리서 흐릿하게 찍혀있다.
5.
나는 이 영화를 '해석'할 생각이 없다. <랑종>에는 이렇다 할 상징이나 의미가 없다. 오직 극복 못할 감정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글도 같은 방식으로 끝맺고 싶다.
영화의 종반부, 밍에게 퇴마 의식을 하기 직전에, 님의 언니는 기도를 올렸었다.
"하나님, 부처님, 누구든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바얀 신도, 무당도, 그 어떤 존재도 도와주지 않았다. 신은 죽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촬영팀도, 친구도, 가족도 당신을 구할 수 없다. 악마가 웃으며 당신에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