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청년세대의 비극
영화의 후반부에 벤은 종수에게 왜 글을 쓰지 못하겠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 종수는 "인생이 수수께끼 같아서 글을 쓰지 못하겠다"고 대답한다. <버닝>은 종수의 입장에서 본 수수께끼 같은 세상을 그리는 데 공을 들인 영화다.
<버닝>을 보는 관객들은 사건의 개요를 온전히 유추할 수 없다. 사건의 개요에 대한 관객들의 주요한 의문은 벤이 혜미를 살해한 것인지, 벤은 무고한 사람인지에 관한 불확실한 진위에서 비롯된다. 벤이 무고한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경우 석연찮은 부분이 한 둘이 아니다. 벤은 종수의 집에 찾아와서 종수에게 자신이 종종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불태우곤 한다는 말을 한다. 벤은 곧 종수의 주변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하나 태울 것이라는 예고를 한다. 그 말을 한 직후에 혜미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벤의 방화 예고는 다분히 의미심장해 보이는데, 이것은 영화를 통틀어 벤이 기이한 행동을 보여준 바가 여러 차례 있기 때문이다. 벤은 신처럼 대상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즐기는 자다. 예컨대 혜미가 벤에게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벤은 자신이 신이고, 음식은 자신에게 바치는 재물처럼 느껴져서 요리가 좋다고 말한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혜미의 반문에 벤은 "방금 한 말은 그저 메타포일 뿐"이라고 답한다. 그는 일상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메타포를 적용하곤 하는 듯 하다. 그 말이 끝난 후, 종수는 벤의 화장실에 들어간다. 화장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용 화장품이 진열되어 있다. 종수는 화장품을 미심쩍게 쳐다본다. 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 발언을 하고 보통 보관하지 않을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 관객들이 벤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화장실에서 나온 종수는 혜미와 담배를 피우며, 도대체 벤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요지의 대화를 한다. "나이는 30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으리으리한 집에서 파스타를 먹으며 지내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서울에는 너무 많다"는 것이다. 종수는 벤과 같은 경제적 계급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을 기이하게 여긴다.
<버닝>에는 종수가 벤의 기이한 행동을 의식하는 숏이 여럿 있다. 벤이 눈물을 흘리는 혜미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자신은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고 했을 때의 리액션 숏, 혜미가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출 때 하품을 하는 벤을 종수가 바라보는 숏. 그중에서 가장 신랄한 숏은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종수의 시선이 담긴 숏이다. 벤이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들이 스스로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그 쓰레기들을 태우는 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자 종수는 "비닐하우스가 쓸모없는지는 누가 결정하죠?"라고 묻는다. 벤은 그것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비록 벤의 대사는 비닐하우스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도태된 쓰레기를 불태우는 것이 자신의 권능이라는 대사에는 자신을 신처럼 묘사하는 오만한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다. 벤은 종수에게 자신이 곧 종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울 것이라는 말을 전하고, 낄낄거리며 종수의 집을 떠난다. 비닐하우스에 대한 그의 말이 메타포였을 경우, 종수와 가까운 곳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말은 혜미를 살해한다는 은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종수는 벤이 떠난 후, 동네를 돌며 불탄 비닐하우스가 있는지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어떤 비닐하우스도 불에 타지 않았고, 어느새 혜미만이 홀연히 사라져 있다.
벤을 의심하는 종수는 혜미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기 위해 벤을 찾아간다. 종수는 혜미가 사라지자마자 절묘하게도 벤의 곁에 혜미와 비슷한 처지의 여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종수가 혜미를 찾을수록 혜미의 행방은 미궁에 빠지고, 종수의 의심은 더욱 커져서 결국 종수는 매일 봉구 차를 몰고 벤을 미행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벤을 미행하던 종수가 산골짜기에서 벤을 따라 코너를 돌았을 때, 벤의 차가 사라져 있다. 당황한 종수가 주변을 살피며 차를 몰자, 종수를 관찰하는 전지전능한 익스트림 롱 숏이 화면을 채운다. 그 후 종수의 뒤에서 벤의 차가 나타난다.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공간을 초월한 전개. 화들짝 놀란 종수는 벤을 피해 차를 숨긴다. 이 씬의 숏은 벤이 전능하게 보이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 씬뿐만이 아니다. 벤을 미행하던 종수가 벤이 다니는 헬스장 앞에 당도하였을 때, 벤은 창문 밖으로 종수를 내려다보지만 종수는 벤을 보지 못한다. 벤에 관한 많은 정황과 숏의 구도는 벤을 신적인 인물로 격상시킨다. 이런 기묘한 씬이 쌓이고 쌓여 관객들의 벤에 대한 의심이 극에 달했을 때, 영화는 결정타를 날린다. 종수가 벤의 집을 찾아갔을 때 종수는 혜미가 사라진 절묘한 타이밍에 벤의 집에 고양이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벤의 화장실에 나열되어 있던 여성용 화장품 옆에는 혜미가 차고 있던 시계가 전리품처럼 전시되어 있다. 이 시점에 종수는 벤이 혜미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게 된다. 종수가 화장실을 나서자 곧 벤의 고양이가 벤의 집을 뛰쳐나간다. 종수는 고양이를 부르는데, 처음엔 오지 않던 고양이가 "보일아"라고 불렀을 때 오자 종수는 혜미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벤은 정말 혜미를 살해한 것일까. 비닐하우스를 태웠다는 벤의 대사가 살인에 대한 메타포라고 해석할 경우, 벤이 혜미를 죽였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주차장에 나타난 고양이가 "보일아"라고 불렀을 때 다가왔다고 해서 그 고양이가 혜미의 고양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고, 벤이 혜미가 갖고 있던 시계와 같은 종류의 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벤이 혜미를 살해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정황은 수수께끼처럼 제시될 뿐이다. 혜미가 사라진 후 종수가 혜미에 관해 알고 있던 정보는 모두 진위가 흐릿해진다. 혜미는 어렸을 때 우물에 빠진 자신을 종수가 구해준 적이 있다고 말하지만, 마을에 계신 할아버지와 혜미의 가족은 동네에 우물이 없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혜미가 키운다고 했던 고양이의 존재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혜미의 집을 찾은 종수는 그곳에 고양이가 보이지 않자, 집주인에게 그 집에 고양이가 있었냐고 묻는다. 이때 집주인은 처음부터 혜미의 집에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이렇듯 <버닝>은 의미심장한 단서를 던지며 관객들이 나름의 추론을 세우도록 유도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확실한 사실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종수가 정체불명의 전화를 받는 장면을 돌이켜보자. 종수는 여러 차례 전화를 받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 말이 없는 전화가 몇 번 온 후, 웬일인지 그 다음 전화에서는 종수의 어머니가 말을 꺼낸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이전의 전화들도 종수의 어머니가 한 것이라고 추론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초반에 종수에게 전화를 건 인물이 누구인지 관객들에게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이 장면뿐만이 아니다. 종수가 혜미의 가족에게 혜미가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혜미의 가족들은 혜미는 우물에 빠진 적이 없고, 혜미는 예부터 그런 거짓말을 잘했다는 말을 한다. 관객들은 우물과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막연한 존재들이 혜미가 꾸며낸 것이라고 유추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 우물과 고양이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은 없다.
-답이 없는 질문의 답을 찾다-
사건의 정황이 아무리 수수께끼 같더라도 종수는 혜미를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혜미는 종수의 인생에 찾아온 실낱 같은 희망이었다. 이것은 남산 타워에 대한 메타포를 통해 관객들에게 제시된다. 혜미는 종수와 처음으로 섹스를 할 때 자신의 집은 북향이라서 빛이 거의 들지 않지만, 가끔씩 남산 타워에 비친 빛이 집에 들어올 때가 있다고 말한다. 종수는 혜미와 섹스를 하며 남산 타워를 통해 비친 빛을 바라본다. 이때부터 혜미는 남산 타워와 결부되기 시작한다. 이 장면 이후에 종수는 혼자 혜미의 집에 찾아가서 자위를 하는데, 이때 종수를 찍는 카메라는 창문 밖에 위치해있다. 3층은 될 법한 높이인데 굳이 카메라를 밖에 두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니까, 이창동은 의도적으로 자위하는 종수를 밖에서 찍은 것이다. 이 숏에서 자위를 하는 종수는 창문에 비친 남산 타워와 겹쳐져 있다. 종수는 자위를 하면서 꾸준히 혜미의 사진을 보는데, 영화는 혜미의 사진을 클로즈업한 시점 숏과 남산 타워가 비치는 숏을 꾸준히 결부시킨다. 종수와 혜미, 남산 타워가 이어붙는 이 숏들은 종수와 혜미의 관계에 대한 메타포다. 종수와 혜미의 인생에는 빛이 거의 들지 않지만, 둘은 서로에게 일말의 빛을 비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혜미는 이제 없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 몰린 종수는 해답을 내려야만 한다. 인생이 수수께끼 같아서 소설을 쓰지 못하겠다던 종수는 벤이 살인자라는 확신을 가진 후 마침내 소설을 써내려가게 된다. 하나 <버닝>은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던 청년이 해답을 찾아 소설을 쓸 수 있게 되는 성장영화가 아니라,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를 확신할 것을 요구 받는 청년 세대가 처한 현실을 다루는 영화다. 종수의 소설은 애초에 쓰여질 수가 없는 소설이다. 종수는 벤이 살인자라는 것을(혹은 혜미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혀주는 사건을 목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수는 소설을 쓰기 위해 혜미에게 배운 특별한 사고방식을 차용한다. 혜미는 종수에게 팬터마임을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준 바가 있다. 귤을 먹는 팬터마임을 하기 위해선 귤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혜미의 집에 들어섰을 때 밥을 줘야 한다는 고양이가 보이지 않자 종수는 "고양이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라고?"라며 혜미에게 장난스럽게 반문했다. 그랬던 혜미는 이제 사라졌다.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지고, 모든 상황이 종수로 하여금 답을 내릴 것을 촉구하지만, 정작 상황을 타개할 명확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종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종수가 벤을 살인자라고 여기게 되는 결정적인 증거인 고양이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수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론을 부정하는 정황을 전부 무시했을 때 쓰여질 수 있다. 소설을 쓰게 된 시점부터 종수에게 수수께끼 같은 현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종수의 소설에 나오는 혜미는, 분명 우물에 빠진 적이 있으며, 명백히 고양이를 길렀고, 필시 벤에게 살해당한 여자다. 종수는 해답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에 해답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초반부로 돌아가서 혜미와 종수가 섹스를 하기 전에 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혜미는 종수에게 "어릴 때 네가 나에게 못생겼다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나냐"고 묻는다. 그러나 종수에겐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없다. 더욱이 영화엔 종수가 그런 말을 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혜미는 기억이 안 난다는 종수에게 묻는다. "자 이제 말해봐. 무엇이 진실인지." 그러나 혜미의 질문은 과연 응당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인 것일까.
영화감독이자 코미디언인 기타노 다케시는 자신의 저서인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 노트'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요즘 세상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말을 너무 많이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마치 강박관념처럼 되어버렸다. 걸핏하면 그런 말을 하는 어른들이 나쁘다. 자기 자신도 삶과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젊은 사람들이 인생이 무엇인지 답을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사회는 청년들에게 끊임없이 해답을 요구한다. 종수는 확신을 종용하는 각박한 사회의 희생자다. 만약 혜미가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면, 종수가 혜미를 잃은 이유는 자명하다. 혜미는 인생의 의미를 찾느라 느끼는 허기인 그레이트 헝거를 경외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출 때, 벤의 친구들은 그녀를 우습다는 듯이 쳐다보았고, 벤은 그녀를 보며 하품을 했다. 혜미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종수의 집에 가서 대마초를 핀 후 노을을 배경으로 한차례 더 춤을 춘다. 관람객은 벤과 그레이트 헝거였던 종수다. 그러나 종수는 벤을 향한 열등감에 매몰되어 혜미의 춤이 내포한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에게 "창녀들이나 그런 춤을 춘다"며 일갈한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혜미는 자취를 감춘다. 혜미의 춤에 대해 사유하는 대신 벤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종수는 더 이상 그레이트 헝거가 아니다. 살아남기 바쁜 우리들의 사회에는 그레이트 헝거가 존재할 여지가 없다. 요컨대 <버닝>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청년세대의 비극을 조명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