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들려준
어느 이가 들려준 이야기다.
이 영화의 가장 표면적인 주제는 일상. 주인공 S는 미국 유학생이다. 버스에 타고, 창가를 보며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고 있는 장면이 카메라에 담기는 와중에, 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영화감독 J는 그 자리에 있지 않다.
완벽하게 반대인 시차. 감독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다. 배우는 하루를 시작하고, 감독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렇지만 같은 때를 보내고 있는 두 사람. J는 욕심이 많다. 그는 감독이면서 배우인데,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감독이다.
그 감독은 그 주인공을 사랑한다. 정말 멀리 있지만, 너무나 아껴주고 싶고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그녀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지만, 가장 가까이 관찰하고 싶어 한다.
그럼 왜 감독일까, 같은 배우로서 그 장면, 같은 필름 속에 담겨야지. 아니다. J는 감독이어야 그 배우의 일상을 어찌 담을지 통제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그런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일상을 비춘다. 그녀는 소설 작가 지망생이기도 한데, 요즘은 그저 그런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 영화 촬영이 끝날 때까지 감독과 주인공은 물리적으로 만나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영화에는 감독이 출연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은 카메라를 응시한다.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것처럼, 마치 이제껏 만나지 못한 사람을 발견한 것처럼. 그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서 감독은 희열을 느낀다.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 배우는 만났을까.
그 남자의 마음속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기둥이 가장 넓은 나무는 그의 마음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주변에 작은 나뭇가지가 하나씩 자라난다. 금방 스쳐갈 인연이라면 그 곁가지는 금세 메말라 없어지고, 다음 생장을 위한 거름이 된다.
그에게 그녀라는 나무가 심어진 순간, 그의 마음속엔 금세 큰 나무 두 그루가 자라났다. 두 나무는 서로에게 양분을 주었고, 서로를 향해 점점 복잡한 가지를 뻗어 갔다.
가지와 가지 사이가 정교하게 겹쳐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가지는 빈 공간을 찾아 뻗어갔으며, 누가 먼저 그 공간을 차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가끔 가지와 가지가 만나는 일이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 있는 두 나무의 가지가 엉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엉켜버린 가지를 잘라내야 할까, 안간힘을 다해 풀어내려 해야 할까. 혹은 그냥 가지를 잘라내도 될까.
엉켜버렸다고 잘라내면 두 나무는 점점 멀어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그의 생각을 멈추게 한다. 엉켜있는 것만큼 얽힐 수도 없지 않을까.
그는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 통 안에 건포도가 들어있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혹시 네가 있을지도 모르는 건포도도 좋아해 줄 수 있는지 묻는다.
불안해서, 매 숟가락 아이스크림을 떠 줄 때마다 유리조각이 있지는 않은지, 모래가 들어가 있진 않은지 확인해오던 그였지만, 아이스크림이 다 녹기 전까진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 확인하고 주고 싶다.
아이스크림이 다 녹을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가, 다시 모아서 얼려서 먹어도 되니까.
그 정도 시간은 기다릴만하다.
그의 마음속에는 큰 범고래가 있다. 그 고래 안을 들어가야 그의 모든 마음이 있다. 그 큰 나무도, 나무를 지탱하는 땅도, 양분도, 고래가 그 나무를 위한 땅인 것이다. 고래는 나무를 키우는 땅만 되어줄 뿐, 그 영혼은 세상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닌다.
고래는 갑자기 깊은 바닷속으로 수직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바다 깊은 곳엔 고등어 떼가 있다.
그 어린아이는 고등어 냄새가 싫었다. 밖에 나가 놀고 들어오면 매일 똑같은 고등어 반찬을 먹어야 했다. 안 그러면 굶어야 했으니까.
심연의 바닷속 고래는 그렇게 고등어 떼를 그저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