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더 Oct 21. 2023

너에게 난

   토요일 오후, 도서관으로 향하는데 비가 내렸다. 한 방울씩 톡톡 떨어지던 빗방울이 도서관에 도착하자 빗줄기로 바뀌었다. 도서관 안에 가방을 내려놓고 커피 한 잔을 든 채 비를 피할 수 있는 도서관 벤치에 앉았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공원의 나무들 위로 소나기가 부었다. 쏴ㅡ 쏴ㅡ. 순간, 아, 이 비! 이 비를 얼마 전에 본 기억이 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자취를 할 때 라디오를 두고 생활했는데, 밤에 잠이 들 때면 방 불을 끄고 라디오는 그냥 켜둔 채일 때가 많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사연을 듣다가 절로 잠이 드는 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한날은 불을 꺼서 캄캄해진 내 방을 영화를 소개하는 여자 DJ의 목소리가 가득 메웠다. 영화 중간중간에 DJ의 내레이션과 영화의 배경 음악, 영화 주인공들의 대화가 적절히 섞인 영화 한 편을 고스란히 귀로 보는 시간이었다.


   기타 반주가 깔리고, 가수 자전거 탄 풍경의 <나에게 넌, 너에게 난>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 때문에 대학 캠퍼스의 아름드리나무 아래로 몸을 피한 지혜(손예진)와 그런 지혜를 발견한 상민(조인성), 상민은 버젓이 가지고 있던 우산을 매점 누나한테 줘버리고 지혜가 있는 나무로 뛰어간다... 고 DJ가 말했다. 그리고 지혜와 상민 둘은 상민의 재킷을 우산 삼아 학교 도서관까지 함께 달린다. <나에게 넌, 너에게 난>은 더 크게 흘렀다.


   그 새벽에 귀로 들은 이 장면이 내 방과 내 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이튿날 곧장 영화 <클래식>을 보았다. 감동이 가시기 전에 그 감동을 붙잡고 싶었다. 홀로 좋아하고 있던 상대였는데 그가 절친의 애인이라서 마음만 간직하고 있던 지혜, 그런 지혜를 자신의 여자 친구를 챙길 때 한 번씩 같이 챙겼던 상민. 비가 쏟아지는 캠퍼스를 상민의 재킷을 우산 삼아 함께 발맞추어 뛰어갈 때의 두 사람의 심정. 설렜다. 그래서 요 얼마 전에 또다시 <클래식>을 본 건지 모르겠다. 도서관 벤치에서 바라본 비는 며칠 전 다시 본 영화 속의 그 비였다.


   대학 2학년 여름 방학 때 고향의 해수욕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해수욕철이 끝나서 아르바이트도 끝났을 때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던 연하남이 내 남자 친구가 되었다. 그해 나의 여름에 소나기는 없었지만, 영화 속의 지혜만큼 벅찬 시간을 보냈다.


   해수욕장 아르바이트는 끝났지만 개강일은 아직 남았던지라 서로 학교가 달랐던 우리 둘은 조금 더 고향에 머물렀다. 23년 전의 고향에는 청춘들이 데이트를 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고, 또 있다고 한들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우린 그의 고향집에 있던 수명이 다 되어 그야말로 덜덜 대는 오토바이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몸빼 바지와 고무신 차림이 어울릴 것 같은 그 딸딸이에 몸을 싣고 둘이서 함께 해 질 녘의 해안가에 자주 갔다.


   한 번은 컴컴해진 저녁에 딸딸이에 오른 나를 그가 인근 학교 운동장으로 데려갔는데 그날 달이 참 밝았다. 아무런 조명도 없는 운동장에 나무와 동상들의 달그림자가 드리웠고 운동장 한가운데는 마치 무대인 것처럼 환했다. 딸딸이에서 내린 내게 그가 신발을 벗으라고 하더니 자기의 발등에 오르라는 거다. 지금 같으면 내 몸무게를 생각하며 극구 거절했겠는데, 그땐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발등에 내 발을 놓았다. 그대로 우린 춤을 추었다. 그러고 나서 달빛에 의지하여 학교 건물 뒤쪽을 흐르는 개울로 갔다.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개울물을 그는 나를 업고 건넜다.


   도서관에 앉아 촥ㅡ 뿌리고 지나가는 소나기를 보고 있는데, 영화 속의 지혜와 상민, 그리고 연하 남자 친구이었던 그가 떠올랐다. 과하지 않게, 격정적이지 않게, 딱 각자의 상황들에서 할 만한 사랑을 만들어간 그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쒹ㅡ 쏟고 나서 없었던 일인 것마냥 멎어버리는 소나기와 다르게 서로를 조용히 바라보며 서로의 곁에서 충분히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다가선 지혜와 상민, 그리고 내게 줄 수 있는 거라곤 시간뿐이었던 그가 나의 시간을 분수에 맞지 않은 사치로 메우려 하기보다 가슴이 터질 듯한 설레는 공기들로 채워준 것이 사랑스럽다.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내 마음 가는 대로 훅 들이댔다가 싹둑 끊어내는 무례한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그럴싸해 보이는 선물과 호의로만 내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진 않았는지. 관계에 뜸을 들여야겠다. 뜸 자체만 볼 땐 잠깐의 시간이 필요한 듯하지만 과정의 첫 순간부터 얘기할 땐 그 짧은 뜸의 중요성이 매우 큼을 느낀다. 사람들에게 내 시간으로 선물을 해야겠다. 잠시잠깐인 것 같아도 내가 그들을 좋아한다는 걸 그들이 넉넉히 알 수 있게 푹 익은 관계를 위한 뜸을 들여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말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