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같은 날
오랜만에 운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사무실 일도 바쁘고 아이들 양육을 도와주시는 친정엄마도 바쁘셔서 도통 운동 갈 시간이 없었다. 두 달 만이었나? 운동가방에 운동복을 넣고는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서면이 생각났다. 운동을 못 가겠다고 연락할까 하다가 최근 몇 번이나 전날 혹은 당일에 운동을 취소했던 터라 추리닝을 함께 챙겼다. 운동을 마치고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들의 등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 옷을 입혀야 했다. 오늘 큰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산에 올라간다고 하였다. 말이 산이지, 어린이집 뒤에 있는 작은 동산의 수준이다. 워낙 활동적이고 장난이 심한 아이라 옷에 먼지를 가득 묻힐 것이 분명하여 맨투맨 티와 추리닝 바지를 꺼냈다. 맨투맨 티가 조금 늘어났나? 왜인지 목이 휑해 보였다. 손수건을 찾아 목에 예쁘게 묶어준 뒤 어린이집 차량에 태워 보냈다.
오늘 재판은 없었다. 다만 써야 할 서면들이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었다. 언제나처럼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캡슐커피를 내린 뒤 책상에 앉아 두 개의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사건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전 11시. 전화가 왔다. 큰아이의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이다. 아이가 3년째 어린이집을 다니는 동안 담임선생님께서 일과 시간에 전화를 한 경우는 없었다. 나에게 전달할 말이 있다면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거나 일과 시간 이후에 전화를 하였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전화를 받았다.
- 어머니, 도규가 산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졌는데요. 의식을 잃고 약간의 경련을 해서요.
선생님의 목소리는 떨렸고 나는 미친 듯이 가슴이 쿵쾅댔다. 침착해야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 지금은 의식이 있어요?
- 네, 지금은 의식이 있고요. 구급대원들이 와서 이제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전주의 유일한 대학병원으로 가달라고 했다. 손발이 굳는 것만 같았다.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차에 올라 막 출발을 하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엔 구급대원이었다.
- 아이가 지금 열이 39도인데 열이 있는 거 알고 계셨어요?
몰랐다. 아침에 아이의 컨디션은 평소와 같았다. 내가 옷을 갈아입혔기 때문에 그 정도의 열이 있었다면 분명 알았을 것이다.
산에서 넘어졌다. 의식을 잃었다. 경련을 했다. 열이 난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계속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나는 침착해야 한다. 병원에 도착하고 주차를 한 뒤 응급실까지 뛰어갔다. 응급실 앞에 구급대원들과 선생님과 아이가 있었다.
- 도규야, 엄마 왔어. 놀랬지? 이제 괜찮아.
내가 걱정하면 아이가 놀랄 것 같아서 애써 웃으며 괜찮은 척했다. 열이 나고 있기 때문에 응급실 밖에서 먼저 pcr 검사를 하였고 들어갈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뇌였다. 잠깐이었지만 의식을 잃었고 경련을 했으니 넘어지면서 뇌가 다친 것은 아닐까. 응급실 침대에 막 누웠는데 갑자기 아이가 구역질을 했다. 더 불안했다. 링거를 꽂고 피검사를 하고 CT와 MRI 촬영을 하였다. 응급실에 들어오면서 아이는 금식을 시작하였고 나도 함께 금식하였다(정확히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때까지 난 7cm 구두를 신고 블라우스와 검은색 바지 정장과 재킷을 입고 있었다. 도무지 병원의 응급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한쪽 팔에는 아이의 토사물이 묻어 있었고 침대 옆 보호자 의자에 구두를 벗어둔 채 털썩 앉아 있었다.
그때 차 안에 있는 추리닝이 생각났다. 운동을 가려고 챙겨둔 운동화도 생각이 났다. 세상에. 이 운명 같은 일은 뭐지. 나는 왜 그 많은 날들 운동을 가지 않다가 오늘 가려고 했을까. 거기에다 레깅스와 반팔티셔츠 조합의 운동복(이것뿐이라면 아무리 정장이 불편해도 참고 있었을 것이다)이 아니라 따로 추리닝을 챙기다니. 간호사는 아이가 금식 중이니 물을 마시고 싶어 하면 손수건에 물을 적셔 입술을 닦아주라고 하였다. 돌 전에야 항상 가방에 손수건을 들고 다녔지만 4살이나 된 아이를 키우면서 손수건이 어디 있..... 있다. 누워 있는 아이의 목에 손수건이 묶여 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목이 휑해 보여 아침에 묶어 주었지.
내가 이 글을 쓴 건 이 운명 같은 일들을 남기고자 함이다. 응급실에서의 급박함과 엄마로서의 불안함, 걱정, 정신적인 고통, 아이의 병증 등이 주제가 되지 않은 것은 다행히 아이의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다면 이러한 글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아이의 진단서 상 병명은 열성경련으로 기재되었다. 열이 어떤 원인에 의해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열로 인한 경련이라는 것이다. 혹시 몰라서 이틀 입원을 하였고 그동안 아이는 안쓰러운 마음에 엄마, 아빠, 할머니가 열심히 사다가 나르는 스티커와 자동차들을 가지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