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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슬플 예정 59

복숭아가 가르쳐 준 니체의 가르침

나에겐 이상한 편견이 하나 있다. 실은 몇 개 있는 것 같은데, 그중에 하나!

‘어른인데 과일을 좋아하면, 어린 시절이 풍족하지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경험에서 비롯된, 오직 나만의 생각이다.

왜냐?

어린 시절을 풍족하게 살았다면, 과일을 많이 먹었을 것이고, 그건 과일에의 결핍이 존재할 가능성이 낮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린 시절을 풍족하지 않게 살았다면, 과일을 못 먹었을 것이고, 그건 과일에의 결핍이 생겼을 확률이 높을 수 있다는 증거이다. 그럴싸하지 않은가?


나만 봐도 그렇다. 나는 어릴 적 과일을 거의 먹지 못해서, 지금의 나이에 과일을 좋아한다. 그것도 많이!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형도 그렇고, 막냇동생도 그렇다. 

내가 과일을 얼마나 좋아하냐면, 사람들이 

‘과일을 참 좋아하시네요!’라고 말을 할 정도이다.

아마 주위에 이렇게 과일을 잘, 많이 먹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 건 아닌가 보다.(다들 정도를 넘어서게 힘들게 산 건 아니었나?)

여하간 그들의 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적절히 먹지 않고, 한 번 더 먹는 모습이 꽤나 낯설게 느껴지나 보다.

그렇다고 게걸스럽게 먹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먹을 때

‘음 맛있다!’

‘와! 꿀맛이다!’

‘와 이게 이렇게 달았나?’

‘대박!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최고!’

뭐 이런 말들을 무의식적으로 많이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어릴 적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밥과 김치뿐이었다.

김치도 뭐 다양한 김치가 아니라, 배추김치?

고만고만한 아들이 넷인 집안이라, 엄마는 김치 대기에도 바빴을 것이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겨울에 김장을 400포기를 했다고 한다.

그것도 2월 말이나, 3월 초가 되면 똑 떨어지고 없더라 하셨다.

400포기라…음…

근데 계산해 보면 얼추 맞다.

일단 한 끼를 먹으려면 배추 한 통이 필요하다.

다른 반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창 자랄 나이의 아들 넷이 있었으니….

하루에 3통씩 먹고, 김치찌개나 김치 볶음이라도 할라치면, 그렇다!

3 달이면 400포기가 거덜나는 것이 계산상 맞다.

인터넷에 ‘배추 400포기’ 검색했더니 이 정도랜다. 

https://www.google.com/search?q=%EB%B0%B0%EC%B6%94400%ED%8F%AC%EA%B8%B0&source=lnms&tbm=isch&sa=X&ve

그 산동네 꼭대기로 배추 400포기를 어떻게 가져오셨던거지?

지금처럼 배달이 가능했던 시기도 아니고,,, 리어카로 끌었던 기억이 있기는 한데,,,,


치킨은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못 먹었던 것 같고,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는다?’ 그럴 수 있다는 것조차 상상도 못 했던 것 같고,

불고기는 아마 큰 형 고등학교 졸업식 때 처음 먹었던 것 같은데…

아니!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엄마는 어떻게 아들 넷을 대학공부를 시키신거지?

대학원이야 알아서들 나왔다고는 하지만, 아들 넷을 대학에.. 지금도 힘든데…

와! 진짜!

니체가 이야기한 ‘초인’이 우리 엄마였던걸까?

여하간 그런 어려운 환경이라 과일은 그냥 잘 사는 집에서 먹는 그들 만의 무엇! 정도로 여겼던 시기가 나의 청소년 시절이다.

그때 과일 중에, 바나나가 그렇게 귀했는데, 뭔가 굉장히 있어 보이고, 실제로도 비쌌다.

바나나만 그랬겠는가?

딸기, 포도, 사과, 수박, 배, 감…..

사과, 배, 감은 그래도 제삿날이 되면 가끔씩 맛을 보곤 했지만, 딸기, 포도, 수박 같은 제사상에 올라가지 못했던 과일들은 언감생심!

그래서 입맛만 다셨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저런 녀석들 엄청 먹어야지!’ 다짐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김 같다.

‘나중에 어른 되면 김 엄청 먹어야지!’

역시 나의 삶은 어린 시절의 결핍을 채워가는 투쟁의 역사이다.


어른이 되고, 과일을 사 먹는 여유가 생기면서, 포도, 딸기, 수박 같은 과일들을 틈만 나면 사 먹기 시작했다.(사과, 배, 감은 음… 어릴 적에 먹었으니까 제외!)

시간이 지나니까 바나나 값도 싸졌다. 10개 정도 달린 한 송이에 3,000원이랜다. 재수!

그래서 바나나 주스도 많이 만들어 먹는다. 우유에 윌을 하나 섞어서 만들면 기가 막히다.

왠지 부유한 자가 된 기분이 들 정도이다. 통쾌함은 덤이다.


아직은 비싸지만, 블루베리도 나오고, 샤인 머스캣 같은 당도 높은 포도에, 스태비아 토마토도 나오고… 아! 진짜 행복하다. 원 없다.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바로 복숭아!

그것도 딱딱한 복숭아!

색깔, 모양, 크기… 어느 것 하나 빠짐이 없다. 


저 핑크 빛 색깔은 영롱하고,

둥그런 모양은 매혹적이며, 

‘복숭아’라는 단어는 홀리듯 사로잡힌다.


한 입 베어 물면, 음…

아삭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 곳곳이 퍼져가는 달콤한 향과 즙!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아득하고, 어지럽고, 아찔한, 희미한 순간이다.

사람도 필요 없고,

삶도 필요 없고,

일도 필요 없다.

그냥 복숭아와 나만 존재하는 까마득한 순간이다. 


지금이 딱, 이 딱딱한 복숭아 철이다.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이제 부드러운 복숭아들이 나온다. 딱딱한 복숭아가 물러가기 전에 부지런히 먹어야 한다. 안 그러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다시 1년을 그리워해야 한다.


우울증 까짓 거!

그냥 이 복숭아 하나면 끝이다.

공황장애 까짓 거!

그냥 이 복숭아 하나면 끝이다.

불면증?


그건 이 복숭아로도 안 된다.

아직 불면증은 회복이 덜 되었다.

시간이 걸리나 보다.


그나저나,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복숭아 같은 존재인가?

아플 때 그 아픔 싹 잊게 해 주는…

우울할 때 그 우울함 싹 잊게 해 주는…

힘들어도 생각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게 해 주는…

고운 색깔과, 고운 향기, 맑은 소리를 지닌 그런 사람인가?


그냥,

‘음 맛있다. 역시 딱딱한 복숭아가 최고야!’라며, 맛 만을 음미하자니 잠시 정적이 인다.

그 정적에서 복숭아는 죽도로 내 어깨를 내리치는 듯하다.


정신 차려라!

더 깨어 있어라!

사람들의 응원과 기대에 부응하라!

진흙에서 벗어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라!

‘나는 아파! 어쩔 수 없어!’ 같은 소리 하지도 말아라!

운명에 순응하는 나약한 존재가 되면 안 된다.

낙타가 되지 말고, 자유로운 정신과 의지를 가진 사자를 거쳐, 결국 순수하고 해맑은 아이처럼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내어라!


입 안 가득 퍼져 있는 즙과 향에서,

사각 하는 소리에서,

‘니체’의 가르침이 울린다.


아까 엄마 생각할 때도, 니체가 생각나더니..

아마 맛있는 것을 먹으니, 엄마 생각이 나나보다.

엄마도 과일 드시고 싶었을 게다.

그래도 꾹 참고, 자식들 대학 등록금 한 푼이라도 모으려고 노력하셨을 테다.

너무 먹고 싶을 때엔, 유통기한이 지나기 직전의 우유를 과일 리어카 아주머니와 사과 한 개로 교환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만큼이나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이리라!

안 되겠다.

엄마 보러 가야겠다.

복숭아 한 박스 사 들고 찾아가야겠다.

잘 씻어서 먹기 좋게 잘라드려야겠다.

“느그 엄마는 인제 늙어서 이가 안 좋아부러야! 부드러운 복숭아가 더 좋아부러야!” 하시면 어쩌지?

그러면,

부드러운 복숭아 사드리면 되지!

그렇게 엄마 보며, 초인의 삶을 배워야겠다.

새로운 삶을 기어이 창조해 내고 마는 인간의 전형을 옆에서 봐야겠다.

그러면 이 시기도 어느새 지나 있겠지.

뒤돌아보며 씨익 미소 지을 수 있겠지.


그냥 복숭아 하나 먹은 건데, 참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든다.

이 시기는 ‘생각을 하며 살라’고 내게 허락된 수양의 시간인 듯!

수양하고, 정진하고,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깨닫고, 수련하고, 수행하고…. 

좋다.

딱 내게 필요한 시기이다.


그때까지 당분간 조심할 예정! 경계할 예정!


#우울증 #공황장애 #불면증 #복숭아 #김장 #니체 #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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