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면 손톱을 깎자!
해야지, 해야지..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언제 하지? 언제 하지?
아! 또 안 했네!
당장 하지 않으면, 꼭 이런 말들을 하게 된다.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말이다.
치약이 떨어졌는데, 치약 사놔야지 했다가 까먹고 나면,, 막상 이 닦으려 할 때 치약이 없는 경우가 그렇고,
배터리가 다 되어 현관문이 삑삑 경고음을 내는데,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그렇고,
차의 휘발유는 특히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그래도 귀찮을 때엔, 오늘은 일단 집에 가고, 내일 아침에 나갈 때에 주유소 들러야지 했는데, 다음 날 늦게 일어나서 주유소 가기가 애매할 때,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조마조마, 거리 계산을 하는데, 아슬아슬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가자니 걱정되고, 주유소 가자니 시간은 애매하고… ‘다음에 이런 상황이 오면 무조건 주유소부터 가서 기름 넣고 집에 가야지..’ 결심하지만, 미룸의 신은 어김없이 승리한다.
대일밴드를 사놔야지.. 하다가 안 사놓으면 꼭 칼에 손이 베인다거나, 혹은 종이에 손이 베인다거나 하는 희한한 일이 일어난다.
멋진 옷을 입고 갈 날이 있어서, 손빨래 해 놔야지 했는데,,,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하다가 꼭 당일 날에야 ‘왜 내가 그때 바로 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데도 왜 나는 자꾸 미루는 걸까?
‘아! 그때 바로 했어야 했는데’하면서도 왜?
정 급한 건이면, 보통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는데,
지금 해도 되고, 나중에 해도 되고 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미루는 것을 선호한다.
왠지 모르게 쫄리고, 급박하게 쫓겨야 일이 더 쉽게, 짧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아르키메데스도 마감에 쫓겨서야 목욕탕에서 ‘유레카’ 하지 않았는가?
헤밍웨이도 약속한 양을 쓰지 않으면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라며, 서재 방문을 밖에서 잠그도록 했다고 하지 않는가?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도박에 빠져 도박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한 집필 계약을 하는 통에, 늘 마감에 쫓겼다고 하지 않는가? 도박빚을 갚으려고 26일 만에 쓴 소설이 바로 ‘도박꾼’이라고 하니,,, 마감에 쫓기면 진짜 엄청난 능력이 도출되나 보다.
기자들은 이걸 ‘원고 마감의 신이 강림한다!’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실제로 ‘마감에 쫓겨야 창의성과 결과물의 산출이 더 효과를 발한다’는 논문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시간이 많은데 하려고 하면, 결과물은 안 나오고, 오히려 시간만 더 잡아먹고 있어서, 그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더 남는 장사라고 경험으로 알아온 터이다.
몇 일 전부터, 손톱 깎아야지, 손톱 깎아야지… 했다.
머리를 감는데, 손톱이 길어서 감기가 힘든 때문이었다.
머리 감으면서도 ‘머리 감자마자, 수건으로 머리 털고 나서, 바로 손톱 깎아야지’ 결심을 한 게 벌써 3번은 넘은 것 같다.
그러다, 오늘은 샤워헤드를 들고,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긴 손톱을 감지했다.
에이 머리 감고 깎아야지.. 하다가… 그러다 또 안 깎는 거 아냐?
잠깐 고민하다가,
먼저 깎고 머리를 감자!
결심하고, 화장실을 나섰다.
손톱깎이를 찾아서 자세를 잡았다.
따각 따각 딱
손톱깎이 소리가 부지런하다.
새거라 그런지, 잘 들기도 엄청 잘 든다.
기분이 좋다. 마치 막 오픈한 식당에 갔는데, 젓가락이며 숟가락이 아주 새 것일 때의 기분 좋음?
새해가 추위의 한가운데 있음은 낡은 것들이 추위를 건너지 못하게 함이라던 어느 시인의 마음을 알겠다. 낡은 것들을 걷어내는 것은 이렇게나 상쾌하다.
손톱 하나의 낡음이 잘려나가고, 의식처럼 마음의 단도리를 하고 나니, 이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아주 단정하다.
깔끔하다.
반듯하다.
흐트러짐이 없다.
매끈하다.
산뜻하다.
반드럽다.
환하다.
깨끗하다.
단정함, 깔끔한, 반듯함, 매끈함, 산뜻함, 환함, 깨끗함!
가만 이 녀석들 내가 원하는 것들이 아닌가?
화려하진 않지만, 정돈된 느낌의 단정함!
낡고 부정적인 것들을 막 씻어낸 듯한 깔끔함!
이제야 제 역할을 잘 수행해내고 있는 듯한 반듯함!
하는 일이 주접스럽지 않고 결과가 야무진 매끈함!
늘 하던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내는 산뜻함!
존재함으로 주위를 밝히는 환함!
이제 모든 것을 다 털어내고 의연하게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는 깨끗함!
와!
손톱 깎았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다양한 것들을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이제 마음껏 머리 감을 수 있겠다. 샴푸를 손에 짜고, 적절히 물이 묻어 있는 머리에 게워 낸 다음, 풍성하게 거품을 내고, 손가락 끝으로 두피를 박박 문질러줘야겠다. 압력은 있지만, 강하지 않게!
선을 넘지 않는 수준의 강도로 북북 밀어줘야겠다.
뭔가를 하려면, 준비를 해야 한다.
수영선수가 준비 운동하고 물에 들어가듯이,
학생이 공부하기 전에 책상 정리를 하듯이,
교회에서 설교 듣기 전에 찬송가를 부르듯이,
소개팅 나가기 전에 옷매무새를 다듬듯이,
맥주를 마시기 전에,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해 두듯이,
여행을 가기 전에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듯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양치질을 하듯이,
머리 감기 전에 손톱을 깎듯이….
이제 준비를 마쳤으니, 본 게임을 시작해 볼까?
수영선수가 준비운동을 마쳤으니 수영을 하듯이,
학생이 책상 정리가 끝났으니 공부를 시작하듯이,
냉장고 안에 시원한 맥주가 준비되었으니, 맥주를 즐기듯이,
양치질을 했으니, 마음 편하게 잠자리에 들듯이,
손톱을 깎았으니, 머리를 시원하게 감듯이,
많이 아프고, 많이 괴로웠고, 많이 힘들어서 그 시간만큼 나를 단련하며 준비했듯이…
이제는 나아가야겠다. 즐겨야겠다. 보여줘야겠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지, 내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내가 얼마나 온화한지를…
내가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는 보여주고 싶지 않다.
내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도 내키지 않는다.
나는 평온하고, 고요하고, 평안한, 유연한, 남에게 도움 되는 묵묵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런 삶이라야 지치지 않고, 초조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삶이라야 의미 있고, 그 안에서 나의 존재감을 발견할 테니까….
이게 손톱 깎으며 얻은 교훈이다.
전에는 손톱 깎는 것도, 서럽고, 슬프고, 아프고, 괴로웠는데…
손톱을 깎다가 잘려나가는 손톱을 보며, ‘쓸모없으니 버려지는구나! 너도 누군가의 살이고, 삶이었는데, 쓸모없어지니 이렇게 잘려나가는구나! 이렇게 버려지고, 잊히는구나! 마치 나 같다!’ 하며 엉엉 울기도 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건가…
사람이 달라진 건가…
마음이 달라진 건가…
시원하고, 좋고, 감사하다.
그러니,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고생한다면,
손톱을 정성스레 깎아보자.
분명 일어설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또 다른 배움을 갖게 될 것이다.
같은 행동인데,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얘기한 일체는 유심조다!’라고 껄껄 웃는 원효대사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잔잔할 예정!
이제는 차분할 예정!
이제는 나지막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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