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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슬플 예정 61

우울증엔 스타벅스!

나는 본래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면 피가 탁해진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강하게 인식된 것이기도 했지만, 커피맛이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처음 마셔본 아메리카노에서 담뱃재 맛이 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래 첫 경험이 좋냐? 안 좋냐? 에 따라 기호도가 결정되지 않나?

여하간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잔에 4천 원, 5천 원!

말이 돼?

거의 한 끼 식사값이 아닌가?

누가 사준다면 먹지 내 발로 커피숍에 들어가서 커피를 사 마신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그랬던 내가 커피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게 된 날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타벅스 커피를 좋아하게 된 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2017년 여름이었다.


명동성당에 가면 바로 근처에 스타벅스가 있다. 거기였다.

오전 11시쯤이었고, 누군가 알려준 레시피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헤이즐넛 시럽 2개’

커피가 거기서 거기지 하며, 한 모금 딱 마시는데….

카페인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면서, 식도를 적시며, 위를 향해 나아가는데,,,,

온몸에 카페인 기운이 촤악 퍼지면서 세포 하나하나를 깨워내고, 잠들어있던 영민함과 괜찮음들이 다들 일어나,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지르며, 흡사 강강술래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왜 이제야 나를 깨운 거야?”

다들 기쁜 소리로 외쳐댔고, 있는 힘껏 환영하는 듯했다.

몸의 환희와 마음의 절정이 달해서, 나도 모르게..

“와! 이거 뭐야?”


살면서 깜짝 놀란 순간이 몇 번이나 있을까?

알프스 정상 ‘융프라우요흐’를 간 적이 있다.(이럴 땐 작은 형에게 참 감사하다. 독일에 사는 형 덕에 유럽에도 가 보고… 형 고마워)

인터라켄이라는 곳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중간에 열차를 갈아타고, 여차저차 좁은 동굴에서 내려서는, 걸어 걸어 동굴을 빠져나가서 마주 한 알프스 정상, 융프라우요흐!

그때

나도 모르게 “와! 뭐야 이거!” 했었다.

와! 진짜 눈으로 가득 덮인 알프스 정상!

햇볕 쏟아지다.

아.. 그 감동을 글로 고스란히 전할 수 없어 죄스럽다. 황망하다. 비루한 글 솜씨가 좌절스럽다.

그냥 엄청났고, 대단했고, 압도적이었고, 출중했고, 비범했으며, 황홀했다.

그날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with 헤이즐 넛 시럽 2개가 딱 그랬다.

엄청났고, 대단했고, 출중했고, 황홀했고, 압도적이었다.

그동안의 내 편협한 인식이 완전하게 박살이 나는 순간이었다. 

오죽했으면 편협한 인식이 박살이 나면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머릿속에 들리는 것 같았다. 

뜨거운 햇볕이 유리창에 부딪힐 때, ‘쨍’하는 소리를 내 듯이…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를 증명당한 순간이었다.


그 후로?

스벅에 가면 늘 파트너(스벅은 직원들을 파트너라고 부른다)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헤이즐넛 시럽 2개 넣어주세요!’한다. 

물론 겨울에는 ‘아메리카노에 헤이즐넛 시럽 2개 넣어주세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입가에 미소까지 띠며 주문한다. 내게 스벅에서의 아메리카노 주문은 그렇게 ‘엄청나고, 대단하고, 출중하고, 황홀하고, 압도적인 것’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의식이다. 

그러니 스벅 갈 때마다, 기분이 좋을 밖에…

요즘엔 주말에 집에 있을 때에도 가끔 간다. 

내가 미쳤나 보다. 식사 한 끼 값을 기꺼이 지불하다니…. 그것도 시내가 아닌 집 근처에서…


바닐라 크림 콜드 브루도 기가 막히다.

가끔씩 돌체라떼도 한 잔 하는데…

그 뭐더라… 그 아주 작은 컵에 나오는 게 있는데… 진하게 한 잔 하고 싶을 때에 마시는… 그 녀석은 마셔도 마셔도 이름을 기억하기가 힘들어.. 아주 근사한 이름인데… 


또 때마다 신메뉴가 나와주니… 아! 스벅!

내가 너를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이야!


그러다가… 

여느 날 처럼, 아메리카노에 헤이즐 넛 시럽 2개 넣어 주문하고, 배가 고픈지라, 조각 케잌을 하나 무심코 주문해서 한 입 딱 먹었는데,,,,,

뭐여? 

이 천상의 맛은 또 뭐지?

입안의 혀를 갈 곳 몰라 헤매게 만드는 저 세상 맛은 뭐란 말인가?

이렇게 달콤하고, 이렇게 부드럽고, 이렇게 살살 녹는 맛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감탄이 나온다.

“와! 이건 또 뭐야?”


이 케잌이다.

레드벨벳 케잌!

음~ 

음~ 

음~

와~

음~

하다가, 정신차려보니 저만큼 남았길래, 잽싸게 사진을 찍었다.

와…

지금도 입에 침이 고인다.

자두 색깔인가?

잘 익은 베리류의 느낌을 연상케 하는 색깔은 물론이고, 쉬폰 느낌의 식감, 그리고, 그 맛! 감칠맛인지, 감미로움인지… 


다른 커피숍이나, 제과점에서 레드벨벳 케잌을 시도해 봤는데, 스벅의 레드벨벳 맛이 나지 않았다. 

아마 그 순간에 내게 딱 들어 맞았나 보다.

그 상황에 나를 충만하게 채워줬나 보다.

시간, 장소, 상황이 그 레드벨벳 케잌이 나에게 오도록 모든 것이 예비되었었나 보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니까!

시간의 타이밍, 공간의 타이밍, 상황의 타이밍!

직업도 타이밍이고,

사랑도 타이밍이고,

투자도 타이밍이고,

결혼도 타이밍이고,

공부도 타이밍이고…


그러고 보면,

우울증에 걸리는 것도 타이밍이고,

공황장애에 걸리는 것도 타이밍이지 싶다.

다 때가 되어서 그 병에 걸리는 것이지 않겠는가?


다행히 병에서 낫는 것도 타이밍이지 않을까?

우울증에서 낫는 것, 공황장애에서 낫는 것!

대상포진에서 낫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제 우울증과 공황장애 차례다.

벌써 많이 나아진 것도 같다.


몇 일 전에는 복숭아면 된다고 했는데, 거기에 이 레드벨벳 케잌 한 조각이면 완벽하다. 창에 방패까지 갖춘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불면증엔 뭐니뭐니해도 맛있는 거 먹는 게 최고인 것 같다. 그러니, ‘좌절할 시간에 맛있는 거 먹고 잠이나 자라!’라고 말해 준 사람은 얼마나 현명한가?

맛있는 거 먹는 거는 할 수 있는데, ‘잠이나 자!’는 내가 아직 어찌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밤에 브런치 쓴다고 이러고 있다. 그래도

내일은 종로에 나갈 일이 있으니, 스벅에 들러서 헤이즐 넛 시럽 2개 넣은 아메리카노 한 잔 해야겠다. 

그렇게 우울증과 공황장애에서 한 걸음 더 달아나야겠다.


오늘 밤은 기분이 좋을 예정!


#우울증 # 공황장애 #불면증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바닐라크림 콜드 브루 #레드벨벳케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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