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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슬플 예정 62

죽은 현인과의 대화


산에 갔다가, 반가운 생명체를 만났다. 

잽싸게 찍는다고 찍었는데, 희미하게 나왔다.

잠자리!

그것도 고추잠자리!

아직 때가 아닌데,,,

고추잠자리는 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흰 구름이 떠가는 맑은 가을과 연관된 이미지인데,,,

빨랫줄 위에 나란히 줄지어 앉아 있거나,

아니면, 누렇게 익어가는 벼 위에 허수아비 주위를 빙빙 도는?

마당에 빨간 고추를 널어놓고, 건조한 따순 햇볕에 바짝 마르기를 기다리는?

아직 고추를 딸 때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저 녀석은 너무 빨리 나온 것이다. 

(참고로 사진 속에서는 가로 4, 세로 9쯤에 희미한 녀석이 그 녀석이다)

곧 천둥 치고, 벼락 치는데 뭐 볼일 있다고, 저리 급하게 나돌아 다니는지..

그래서 천둥벌거숭이라고 불리나 보다. 

그나저나 빨간 고추잠자리를 천둥벌거숭이라고 이름 붙이다니,,, 진짜 선조들의 지혜에 깜짝 놀라게 된다. 나는 그저, 팬티만 입고, 동네에 싸돌아다니는 꼬마 녀석들을 그렇게 부르는 줄만 알았는데… 알고 나면 신기한 것들이 참 많은 듯하다. 

옛날 과거 시험 보던 곳을 ‘난장’이라고 해서, 정신없고, 뒤죽박죽인 상태를 ‘난장판’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내가 최근에야 알고 다소 놀란 말은 ‘이판사판’!

절에는 경전을 공부하고, 참선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들이 계셨는데 이를 ‘이판’이라 하고, 밥하고, 빨래하는 절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스님들을 ‘사판’이라 불렀는데, 어쨌든 그 시절에 스님이 된다는 것은 신분계급상 최하층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어서, ‘볼장 다 보다’, ‘인생 끝장이다!’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알고 나니, 그럴싸하지 않은가?

왠지 면벽 수도하는 잿빛 승복을 입은 스님도 떠오르고, 등 뒤에 시주 주머니 메고, 목탁 두드리며 가가호호 방문하는 스님도 떠오르고,,, 

최하층 신분인 스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그들의 삶과 업에 대한 묵직한 울림이 ‘이판사판’이라는 단어에서 스물스물 피어난다.

그나저나 스님들은 속세와 단절하고, 무엇을 찾으려 했던 것일까?

경전을 외우고, 108배를 하며 무엇을 알아내려 했던 것일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를 아주 어렸을 적에 본 기억이 있다. 내용은 잘 모르겠고, 제목이 근사해서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불교도 잘 모르고, 선종도 잘 모르고, 

인도에서 대승불교, 소승불교니 하는 것들은 고등학교 때에 사회책에서 본 기억이 있고.. 여하간 몇 년 전에 읽었던 책에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중국에 사람들이 많아서 전파하러 간 것이다!’라고 했다. 인도의 왕세손으로 태어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가서 진리를 설파한다…. 그래서 9년간 소림사 토굴에서 9년간 잠을 안 자고 면벽수도를 한 걸까?

기존의 것을 모두 포기하기에 그만큼의 고통과 인내의 시간들이 필요했던 것일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참고, 견디는 시간들이 1,500년 전에도 필요했던 것일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사성제(네 가지 거룩한 말씀) 중 첫 번째를 ‘생즉고’라고 한 것인가?

하긴 삶은 시작부터가 고통이지 않았는가?

엄마 뱃속에서는 암흑이었고, 주위는 온통 물로 가득 차 있고, 좁은 터널을 빠져나와야 했을 때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세상에 나왔는데, 너무 추워! 자기가 있던 곳과 달라!

그래서 ‘아앙!’하고 우는 것이겠지..

그렇게 시작된 고난의 길!!

배우고, 깨지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기도 하고,

취업시험에 계속 떨어지고,

‘이 번엔 되겠지, 이 번엔 꼭 되어야 하는데…’하며 고시에 3번, 4번, 5번 도전하고…

국회의원 선거 도전도 그렇고…

자기 집 하나 가져 보겠다고 열심히 사는데, 갑자기 집 값이 폭등해 버리기도 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불치병에 걸리기도 하고…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으로 치유 불가능한 병 때문에 평생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고…

니체가 그랬다.

태어날 때부터 유전병을 앓고 태어나 평생을 우울증, 불면증으로 시달리다가, 뇌질환에 걸려 마지막 11년은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비운의 철학자!


뼈는 욱신욱신 쑤시고, 눈은 타들어갈 것 같고, 지끈거리는 두통이 평생 따라다닌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것도 유전병이어서 곧 나을 거라는 희망이 없는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 경험을 빌어 설명해 보자면, 아마 니체는,


일단, 오직 건강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건강 외에는 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부, 명예, 사랑… 이런 것들이 아닌,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에만 집중을 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그것도 한 두 달 병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생을 그리했으니, 아주 오랜 시간을 자신을 들여다보고, 인간은 어떤 생각을 언제 하게 되는지 스스로 정립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조심히 생각해본다. 나도 그랬으니까!


두 번째로, 그런 시간들을 거치고 나면, ‘변화’의 시간이 도래했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왜 남의 눈치를 봐야 하고, 남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하지 않았을까?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했던 나, 남들보다 더 좋은 학교를 가고, 남들보다 빨리 승진을 하고, 남들보다 더 좋은 차를 타야 하고 하는 익숙한 사고와 전통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왜 남의 눈치를 봐야 하고,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지? 나는 나야! 오직 내가 중요하고, 내가 나의 삶을 결정하는 거야! 누구도 나를 규정짓거나,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 인생은 너무 짧아! (고통과 병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고 이야기한 것이겠지. 자신의 삶을 자기가 개척해야 하는데, 신께서 다 알아서 계획하고, 알아서 해주신다고 하니… 니체의 입장에서는 오랜 생각의 결과로 ‘신을 떠나라’라고 말한 것이겠지. 단순히 종교적인 신을 넘어, 나로 하여금 복종해야 하는 기존의 관습이나 따라야 하는 도덕, 규범까지도 무의식적으로 따르지 말라고 한 것일 테다. 망치로 들고 다 깨부수라고! 그래서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불리는 것이겠지. 어디선가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오직 나만이 나의 삶을 규정하고, 나의 삶의 올바름을 판단하는, 내 자신이 주인이 인간, 즉 ‘초인’은 모든 것을 깨부수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네 번째로, 신, 규범, 관습, 도덕뿐 아니라, ‘사람’도 믿으면 안 된다. 온 마음 다해 사랑했던 ‘루 살로메!’ 사랑의 방식이 서로 달랐고, 주변인들의 영향도 커서 어쩔 수 없이 결별하고 말았던 니체의 뮤즈! 건강 때문에도 힘들었던 니체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정신적 아픔은, 육체적인 아픔보다 더 절망적이고, 더 고통스러웠으리! 죽고 싶을 만큼 허무했으리! 감정의 끝간데에서야 비로소 절실한 철학의 완성이 가능했으리! 그래서 루 살로메와 결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역작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나온 것은 아닐는지…. 역시 사랑은 내면의 심화와 영혼의 성숙을 천작시키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루 살로메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위대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도 지독한 영감을 선사했으니 진짜 감사해도 되겠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다섯째로, 이런 여러 이유들로, ‘사람은 고통이 있어야 성숙해진다. 그러니 고통을 받아들여라!’라는 의미에서 ‘니 운명을 사랑하라!’ 그 유명한 ‘아모르파티’!라고 말한 것은 아닐는지...

이제야 모든 것이 착착 해석되는구나!

 ‘나를 죽게 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도 그래서 나온 말이겠지. 


소림사의 토굴에서 9년간 면벽수도를 했다던 보리달마대사도 ‘생즉고’ 삶은 곧 고통이다!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깨우쳤고, 병마와 45년을 넘게 싸우던 니체도 ‘고통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거기에서 해탈이 시작되고, 초인으로의 성숙이 시작된다.

결국 아픔이란, 고통이란,

‘내가 잘 살고 있나?’라는 근원적인 의문에 답을 주는 시간이고, 앞으로 어찌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정립하는 순간인 것이다.

아프고, 고통스럽다면 내가 잘 살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래서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 첫 문장이,

‘인간은 도전하는 한 방황한다!’


보리달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삶은 곧 고통이다!”

니체가 내게 한 마디 하는 것 같다!

“니 운명을 사랑하라!”

괴테도 옆에서 거든다

“네가 방황하고 있는 것은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는 잘 살고 있는 거다!”


허허허.

하다하다 이젠 스님이, 철학자가, 작가가 내게 도움을 주신다.

죽은 현인들과의 대화라니..

아무래도 내가 정신이… 온전해지나보다!

당분간 온전해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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