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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슬플 예정 66

설거지를하면서 행복해하다

나는 희한하게 설거지가 그렇게 좋다.

어려서.

아! 또 어린 시절 얘기다.

그러고 보면 참 나는 어린 시절에 지금의 나를 많이 형성했나 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도, 

신발을 좋아하는 것도,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어쨌든 웃으려고 하는 것도, (근데 왜 나는 결국 우울증에 걸리고, 공황장애를 진단받은 것일까? 힘듦이 선을 넘었던 것이겠지. 참 많이 힘들고, 참 많이 괴로웠고, 참 많이 지쳤고, 참 많이 다쳤고, 참 많이 고달팠고, 참 많이 무너졌고, 참 많이 침울했고, 참 많이 참담했고, 참 많이 암담했었나 보다. 경계를 넘는 아픔이었나 보다)

그리고, 설거지를 좋아하는 것도!


그때엔 다들 연탄불에 의지해서 방에 불을 넣고, 그 연탄불에 물을 데워, 세수하고, 씻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희한하게 설거지 할 때에는 여지없이 따듯한 물이 똑 떨어지고 없었다.

그것 참 희한하단 말이지.

자주 그랬던 것 같다.

아침저녁으로 우유 배달일을 하시는 엄마를 도와 설거지며, 빨래, 연탄 갈기, 바느질(양말이 구멍이 나면 바느질을 해서 신어야 했다)등 집안일은 늘 나의 차지였다.

큰 형은 큰 형이라고 안 하고,

작은 형은 싸움을 잘하는 형이라서 안 하고,

막내는 어리다고 안 하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늘 나였다.

여러 집안일 중에, 설거지가 가장 기억에 나는데 그 이유는,

겨울에 차가운 물에 손을 넣어야 하는 그 공포!

그게 아직 내 양손에 흡사 전기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다.

찌릿...

나만 산동네에 살았던 것은 아니겠지?

나만 이 평생 잊힐 리 없는 자극을 양 손에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차가운 물에서는 퐁퐁도 잘 안 풀린다.

그래도 가스통에 가스가 없는 날에는, 연탄불에 물을 데워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

별 수 없다.

샥샥, 슥삭슥삭!

후다닥 빨리 해치워야 한다.

안 그러면 손에 동상 걸릴 것이 뻔하다. 

미간에 힘 잔뜩 줘가며,

이것만 하면 돼. 거의 다 됐어!

그래. 이제 헹구기만 하면 돼!

그때 다짐했다.

나중에 아파트에 살게 되면, 따듯한 물만 나온다면, 평생 아주 기쁜 마음으로 설거지를 할 거라고!

그리고, 아파트 생활을 하게 된 이후로는 거짓말처럼 설거지를 아주아주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설거지를 할 때마다 '성공한 인생'을 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즐기던 설거지를

우울증, 공황장애, 대상포진, 불면증이 걸린 이후로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게 다 내겐 부질없고, 모든 게 내겐 절망을 부르는 장송곡 같았다.

서럽고, 짜증 나고, 울고만 싶은 1년 넘는 시간들이 흘렀고,

난 오늘 드디어 설거지를 했다.  


퐁퐁을 준비하고, 따듯한 물을 마음껏 풀어주었다. 거품이 몽글몽글 아주 잘 피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 찬물에게 큰 소리로 비웃어줬다.

“봤냐? 퐁퐁이 이렇게 잘 풀린다! 음 하하하하하!”

그리고는 가열차게 수세미를 들었다. 

요즘 수세미는 참 신기한 것들이 많다.

이것도 설거지 하는 맛이다.

수세미가 해마다 바뀌는 기분이다.

재질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설거지를 하는 내내!

행복했다.

예전의 기억들도 되살아났고,

또,

'아! 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있구나!'라는 생각?

마치 '내가 그동안의 불우공대(불면증,우울증,공황장애,대상포진)를 털어내려는 의식을 치르고 있구나!'라는 생각?


이렇게 걱정도 씻겨 내려가면 좋겠다.

이렇게 우울감도 지워져 버리면 좋겠다.

이렇게 뽀송뽀송 내 삶도 반짝이면 좋겠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어느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럼블피쉬의 노래들?

으랏차차, 낭만고양이 등등...


아직 완벽하게 나은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언제고 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힐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어느새 마음 다 잡고,

건강하게 노력하려는 나를 보니 참 대견하다.


숨도 못 쉴 만큼 아파하며, 벽을 긁어대며 울부짖던 날도 있었는데,

생각들이 너무 괴로워 '차라리 나를 죽여라!' 하며 가슴을 치던 날도 있었는데,

눈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화장실에서 못 나오던 날도 있었는데,

산에 올랐다가 밑동이 잘린 나무를 보며 미치도록 서러워하던 날도 있었는데....


이제 지난 일이었으면 좋겠다.

이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희망을 꿈꾸면 좋겠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내면 좋겠다.




#설거지 #우울증 #공황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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