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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 Sep 29. 2024

제스프리 키위 빡빡이

feat. 가발 맞춘 날

너무 반가운 가을비가 쏟아져 내렸다.

유난히도 길었던 올해 여름.

나는 7월 초. 암진단과 함께 여름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폭염이 지속되는 나날 속에서 몸과 마음은 함께 지쳐갔다.

달력의 숫자보다는 계절의 변화로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게 된다.

첫 시련의 당혹스러움과 고통의 과정 속에 늘 함께 있던 무더위가 이제야 물러나게 된 듯해서 이 이례적으로 길었던 여름의 끝이 반가우면서도,

내년에도 이 더위와 매미소리과 푸르름을 만날 수 있을까, 있겠지, 있을 거야...

라는 생각의 흐름에 속에서 울컥한 것이 올라온다.

언제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아름다운 변화들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언제든 누릴 수 있다 생각했던 것들 모든 것들의 유한성을 깨달을 때 모든 것이 선명하고 귀하게 여겨진다.

계절은 어김이 없지만 이제는 나의 시간에 어김이 자리할까 봐 문득문득 겁이 나기도 하고.

계절이 지나감에 아쉬워하기보다는 다가오는 가을을 즐겨야지.

옅어지는 초록잎들과 조금씩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 조금 더 멀어진듯한 선명하고 파란 하늘, 살랑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바닥에 뒹구는 알이 꽉 찬 도토리도...

내 눈앞에 있을 때 조금 더 눈 밝게 즐겨야지.

그리고 곧 찾아올 시리고도 따뜻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인 겨울도.

그리고 내년에 찾아올 사계절도 꼭 즐겨야지.

조금 더 욕심 내어야지.



추석연휴가 끝나고 엄마와 언니들과 함께 부산으로 가발을 맞추러 갔다.

다음 달에 있을 내 생일을 맞아 언니들이랑 동생이 예쁜 가발을 선물한단다.

예전엔 참 많이도 투닥거리며 싸웠는데 요즘은 나를 바라보는 눈길과 목소리들이 그렇게 꿀이 뚝뚝 떨어질 수가 없다. 평소답지 않게 심하게 애정 어린 시선들이 부담스럽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누릴 수 있을까 싶어 이 기회에 마냥 누리기로 한다.

언니가 미리 예약해 놓은 부산의 항암환우전문가발로 유명한 헤어숍을 방문했다.

나는 늘 얘기했었다.

머리카락은 나의 감정을 건드리고 현재의 행복을 좌우하는 촉발제로써의 의미는 단 1도 없다고.

하지만 곧 '빡빡이'가 된다는 생각에 조금 겁을 먹었던 것도 사실이다.

머리 깎고 출가하지 않는 한 내 생에 이런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으니까.


샵으로 들어서니 디자이너분께서 미리 여러 개의 가발을 준비해 놓으셨다.

자리에 앉자마자 "머리부터 자르실래요?" 하신다.

괜히 어물쩍 뜸 들이고 망설이면 같이 간 엄마와 언니들이 또 슬픈 감정에 휩싸이고 울기라도 할까 봐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 머리부터 싹 밀어주세요"라고 얘기한다.

얘기를 듣고 바로 바리깡이 작동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솔직히 속으로 엄청 쫄았었다.

바리깡이 머리 위를 한번 훑고 지나가자 바로 두피가 훤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라는 심정으로 담담히 거울을 보는데 살짝 눈물이 올라오는 걸 겨우 삼킨다.

옆에서 엄마는 벌써 눈물을 훔치고 계신다.

내가 슬퍼하면 엄마와 언니들이 더 슬퍼할까 봐 일부러 주저리주저리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내 마음부터 진정시키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부러 크게 웃어버린다.

삽시간에 내 머리는 빡빡이가 되었다.

샴푸를 마치고 여러 개의 가발을 써보고 제일 잘 어울리는 가발을 구매하고 샵을 나왔다.

인모로 만들어진 가발이라 가격이 상당히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왜 인지 모르게 가발티가 나는듯했지만 언니들과 엄마는 말 안 하면 가발인지 모르겠다 하는데 이게 위로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샵을 나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또 새로운 관문이 남았다.

나의 빡빡이의 모습을 가장 자주 보게 될 가족들이 나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큰 부작용 없이 일상을 잘 지내고 있는 나를 보며 아이들도 처음에 마주했던 암의 두려움이 조금씩 상쇄된듯한데 이제 나를 볼 때마다 엄마는 '암환자'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게 될 상황이 싫었다.

하지만 나의 외형이 달라지고 아니고에 따라서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아이들도 두렵지만 현실을 직시하고는 있어야 하니까.

언제라도 나의 컨디션이 안 좋아질 수도 있고, 응급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나의 상황은 숨긴다고 내가 애쓴다고 달라질 수는 없다.

그냥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를, 엄마의 머리카락이 없이 지는 것이 두려운 상황이라거나 엄마가 수치스러움을 느끼거나 너무 슬퍼하지는 않았을까라는 슬픈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난 후 엄마가 머리를 보여줄 테니 기대하라고 얘기하고 가발을 벗었다.

그리고는 "마이 프레셔스~"라고 외치며 골룸흉내를 내니 아이들은 잠시 놀라는 듯하더니 이상하다고 그만하라며 자지러진다.

그렇게 빡빡이와의 첫 만남은 신나는 웃음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오늘은 키위를 깎아먹는데 아이들이 내 머리에 키위상표스티커를 붙여놓고는 사진도 찍고 재밌다고 난리다.

그래서 참 감사하다.

두려움과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고 즐거움과 행복 속에 빡빡이로 있을 수 있음이.


아프고 나서 매번 느낀다.

강한 척, 괜찮은척하는 나의 모습이 스스로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내가 중심을 잡아야 주변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안심한다는 걸.

그들의 안심과 편안함과 즐거움을 보면서 나는 또다시 힘을 내어 본다.

그래, 나는 강해질 거야! 꼭 이겨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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