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끼묘 Aug 09. 2020

그래, 나 예민해! 그리고 그게 나야.

나다운 건 나를 인정하는 것

 

 "네가 예민해서 그래, 좀 둥글둥글하게 살려고 노력해 봐!"


 하소연은 시작도 안 했는데, 평소 예민 하단 이유로 언제나 나는 가해자로 몰렸다. '내가 대체 뭘 잘못한 거지?'의 물음표는 미쳐하지 못한 말들과 함께 항상 가슴속 깊이 박혀있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일에도 '이게 화낼 일인가?', '남들도 나와 같은 기분인 건가?', '내가 또 예민한 건가?' 등의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됐다. 그리고 그런 잡념들 안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내 생각, 표현, 주장들은 힘을 잃었고 나다움은 사라지고 있었다.






 예민한 사람을 떠올리면 흔히들 깡 마른 몸매에 날카로운 인상, 그리고 끝이 뾰족한 안경을 고집할 것 같은 고전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또 모든 일에 철두철미하고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한마디로 피곤한 사람.


 나는 예민하다. 하지만 마르지 않았고, 오히려 먹는 걸 좋아해 혼자 먹어도 2인분의 음식 값이 나올 때가 있다. 성격이 그러면 좋으련만 얼굴만 둥글둥글하다. 또 업무상 실수들에는 관대한 편이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몰라서 그런 거겠지~' 라며 넘겨버리고 크게 화를 내본 적도 없다.


 예민하다고 하면 보통 불같이 버럭 화를 낼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민한 사람들의 표현은 본인을 가해자로 만들기 쉽기에 꾹꾹 눌린 채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화를 내기 전 이것저것 스스로 정당화시킬 것이 많아 어느 순간 화내는 법도 까먹게 된다.


 

 그러면 대체 어느 부분에서 예민한가? 의 질문에는 인간관계와 그에 따른 상대에 대한 예의, 배려, 시간 약속 등이라 답할 수 있다. 예민함의 정도는 측정하기 힘들지만 그 기준은 명확하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살아가면서 대부분의 하소연은 사람을 상대하며 생겨나는 일들이기에 나는 예민한 사람으로 못이 박혔다.


스스로 예민한 부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타인에게는 그러지 않으려 항상 조심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또 '나는 안 그러는데 너는 왜 그래?'라며 예민함의 정도가 심해지기도 한다.


이 또한 '모르고 그랬겠지~'라며 처음 몇 번은 넘어가지만 계속 반복되면 '날 무시하네?'로 시작되어 인간관계를 정리해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굳이 풀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왜? 몇 번이고 준 기회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크게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예민함에서 나온다. 나는 감정선이 일정하게 유지되길 원한다. 너무 좋지도 그렇다고 너무 나쁘지도 않은. 기분이 너무 좋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함이 있고, 또 반대의 상황에선 기분이 너무 안 좋으면 회복하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내 감정이 타인으로 인해 안 좋은 쪽으로 기복이 생겨버리면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피로를 막기 위해 인간관계가 틀어졌다해서 내 감정을 소비해가며 애쓰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나를 방어하기 위해 '예민함' 선택했다. 그리고 이걸 나의 단점으로 여겼고, 오히려 부정하려 들었다. 그래서 겉으로 티 내지 않기 위해 나의 본모습은 숨기고 애써 쿨한척하며 살아왔다. 천성이 그런 성격인데, 그걸 숨기려 드니 답답함에 숨이 막혀왔다. 날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관계, 그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도 많다.


그렇게 난 지쳐갔다. 그리고 나를 잃어갔다. 모든 걸 예민한 내 탓으로 돌려버리고 입을 다물었더니 정신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자존감이 떨어져 모든 관계에 '을'이 되어버렸다. 모르는 사람을 새롭게 만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입맛대로 맞혀줘야 하는 모든 게 질려버렸다. 한참 사회생활을 시작할 20대 초반부터 큰 난관을 만난 것이다.


그러던 중 20대의 딱 중간인 25살. 사회생활 그리고 그로 인한 인간관계에 진절머리가 나 나가떨어지기 직전, 문득 내가 너무 가여워 보였다. 내 삶의 주체는 '나'인데 왜 남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는지?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데 내 기분, 감정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계속되었다.






 예민한 게 어때서? 그게 나인걸 뭐.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예민하다 해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인간관계에서 나름의 룰을 정했고, 내가 싫어하는 건 타인에게도 절대 하지 않았다. 여기서 룰이란 '말을 꺼내기 전에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기, 상대방의 시간도 배려하여 약속시간에 늦을 거 같으면 미리 연락 주기' 등 당연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연한 것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런 걸 "네가 그렇지 뭐~"라며 가볍게 넘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넌 날 무시하는 거야 뭐야?"라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는 후자이며, 잘못은 예민한 내가 아닌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민한 걸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한테도 확실하게 선을 긋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이러한 부분은 참지 못해. 물론 나도 조심할 테니까 너도 조심해줬으면 좋겠어."와 같이 말이다. 그러자 주변에서도 반응이 달라졌다. 약속시간에 항상 말없이 늦던 친구도 미리 연락을 해왔고, 내 감정은 생각 없이 '장난'이라는 면죄부로 함부로 말하던 사람들도 줄었다.

 

(여기서 '장난'은 장난을 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대방을 가장 바보로 만드는 단어이다. 화를 내면 "장난인데 왜 그래?"라며 속 좁은 사람 만들기 딱 좋은 단어로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 나에게 뱉은 말이 진짜 장난인지 아닌지는 언제나 그 말을 들은 나의 판단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여러 번의 기회와 회유에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 또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는 자연스레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남게 되었고, 서로 존중하며 몇 안되지만 깊은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덕분에 인간관계에서의 스트레스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부정하려고만 했던 나의 예민함을 인정한 후, 나의 머릿속은 다른 물음표들로 가득 찼다. '내가 틀린 걸까?'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을 오히려 '나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와 같은 물음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예민한 사람들의 장점'이란 글을 읽었다. 여러 장점들이 있었지만 그중에 가장 와 닿았던 두 가지를 뽑자면 감정이입 능력과 상황 파악 능력이 좋다는 것이다.  

 

 예민한 사람들은 평소에도 본인의 감정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작은 부분도 세세하게 생각한다. 예민하기에 예민해지지 않으려고 수시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달까? 그래서인지 그만큼 타인의 감정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타인의 일들도 본인 일처럼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맞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의 고민 상담을 듣고 있다 보면, 그게 마치 나의 일처럼 느껴져 상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내 인상이 찌푸려지곤 한다. 결혼식장에서는 신부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릴 때도 있으며, 화를 내다가도 상대의 마음이 공감되어 이해하려 드는 경향이 크다. 또 일부러 슬픈 영화는 피한다. 훌쩍임이 아닌 오열 수준의 눈물을 뽑게 되어 머리가 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민함의 안테나는 나에게만 향해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표정, 말투에도 즉각 반응하게 된다. 그래서 무시하려고 해도 미어캣처럼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덕분에 살면서 '눈치가 없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또 다른 장점으로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창의적인 것이 있다.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이와 같다. 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나의 감정들을 정리할 무언가 필요했다. 예민함을 부정하려고만 했을 땐 주체가 안 되던 감정들이 심장 터질 듯 벅차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인정하고부터는 그 당시 느꼈던 나의 감정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핸드폰 메모장, 수첩 등에 짧게나마 적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마음에도 여유가 찾아왔다. 그리고 진정 내가 어떤 걸 원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나의 성격, 그리고 더 나아가 나를 항상 부정하고 스스로를 낮췄던 모습을 바꿀 수 있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나를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일으켜줬던 건 바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좀 예민하면 어떻고, 둔하면 어떤가? 또 체력이 약하면? 실수가 많은 편이면? 그게 바로 나 인걸. 체력이 약하면 약하니까 건강한 사람보다 더 건강관리에 힘쓰면 되는 거고, 실수가 많으면 느리지만 몇 번이고 검토해서 실수를 줄이면 된다.


 나다움을 잃게 하는 것도 또 나다워질 수 있게 노력하는 것도 언제나  자신이고,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두 명의 오빠 그리고 두 명의 새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