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리 교사 에세이
“선생님, 저 망했어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습니다. 침울한 목소리와 축 늘어진 어깨에서 걱정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무슨 일인지 물으려던 찰나, 아이의 손에 들린 영어 단어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겉표지가 낡은 걸 보니 꽤 오랜 시간 암기에 공을 들인 모양인데 시험이라는 녀석과는 도통 친해지기 어려운가 봅니다. 한우리 수업이 끝나면 영어학원에 가서 ‘테스트’를 봐야 한다며, 친구들이 올 때까지 단어장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시험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종종 긴장된 상황에 놓입니다. 자기소개, 모둠 발표, 체육 대회 등 무엇이든 잘 해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울상을 짓기도 합니다. 이럴 때 고심해서 고른 말들로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거립니다.
“힘들어도 참고 꾸준히 하더니 역시 잘 해내는구나!”
“수업에 집중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제가 건넨 한 마디에 활짝 웃는 아이들이 있는 한편,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일부러 칭찬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 위로해주려고 하시는 거 다 알아요.”
나이보다 제법 어른스러운 말까지 합니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머쓱해지는 것도 잠시, 마음이 아려옵니다. 해맑게 웃으며 ‘그렇죠? 제가 이 정도에요.’라고 큰소리쳐도 괜찮은 나이인데 그렇지 않으니까요. 아이들의 자신감을 높여주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3학년 수업 도서로《양순이네 떡집》(김리리 글, 김이랑 그림, 비룡소 펴냄)을 만났습니다. 주인공 양순이는 다른 사람 앞에만 서면 말문이 막혀 친구를 사귀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손수 준비한 생일 초대장도 주지 못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떡집을 운영하는 꼬랑지는 그 모습을 보고 양순이를 위한 떡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말이 술술 나오는 술떡’ ‘마음의 소리가 조곤조곤 들리는 조롱이떡’ 등 이름만 봐도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가격은 더 훌륭합니다. ‘검은 한숨 길게 한 번’ ‘사랑이 담긴 따뜻한 입김 다섯 번’. 떡을 앞에 두고 망설일 양순이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 값입니다.
덕분에 양순이는 친구들에게 생일 초대장을 나눠준 건 물론 잔치에 온 친구들을 위해 춤까지 선보입니다.
자신감에 찬 양순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만큼 떡을 먹으면 고민이 사라진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야기 전개도 흥미로워 단번에 술술 읽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미로만 보기에는 아까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순이와 꼬랑지의 마음에 공감하며 의견을 나눈다면 아이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교재를 펼쳐보니, 인물들에 대해서는 물론 자신감을 주제로 한 발문들이 잘 나와 있었습니다. 자신감이 필요한 상황, 자신감을 갖는 방법, 그리고 용기를 주는 나만의 주문 등 생각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한 구성이 눈에 띄었습니다. 또 자신을 위한 떡집을 꾸려보는 활동도 있어 기대가 되었습니다.
《양순이네 떡집》으로 수업하는 날, 아이들은 책이 정말 재미있었다며 양순이를 보고 느낀 점과 자신감이 필요한 상황을 술술 풀어놓았습니다.
“반장 선거에 나가고 싶지만 아무도 뽑아주지 않을까 봐 망설여져요”
“자꾸 별명을 부르는 친구에게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어요”
“숙제가 너무 많아서 어딘가로 숨고 싶을 때 자신감이 필요해요”
아이들은 다른 친구의 이야기에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에게 힘을 주는 주문을 외쳐보자고 하자, 서로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아브라카다브라”
“할 수 있다!”
“포기하지 마!”
그동안 숨겨두었던 마음을 털어놓았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불안과 걱정은 덜어지고 자신을 믿는 힘은 더 단단해진 듯 보였습니다.
이제 나만의 떡집을 꾸려볼 차례. 아이들은 간절한 마음과 기대를 담아 떡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억이 퐁퐁 나는 퐁퐁이떡’ ‘공부를 잘하게 되는 공부떡’ ‘정리를 잘하게 해주는 정돈떡’ 등 작은 손끝에서 세상에 하나뿐인 떡이 빚어졌습니다.
값을 숫자가 아닌 말로 표현하는 건 어색해했지만, 하나하나 적을 때마다 마치 신비한 명약이라도 만든 것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효과까지 써 내려가자 정말 어딘가 이런 떡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도 아이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수업 전에 미리 그려놓은 떡을 내밀었습니다. ‘영어시험에서 만점 맞는 만만의 콩떡’ ‘아프지 않게 해주는 펄펄 기운떡’ ‘생각이 저절로 써지는 쑥쑥 가래떡’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그림의 떡일 뿐인데도 넙죽 받아먹는 시늉을 하며 좋아했습니다. 이제 단어 시험도 잘 보고, 친구들 앞에서 떨지 않고 말할 수 있겠다면서요.
그 모습을 보자, 때로는 어른들의 칭찬보다 상상으로 빚어낸 이야기가 아이들의 자신감을 키우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은 힘이 세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 이 글은 한우리독서토론논술에서 발간하는 교육 매거진 '한우리에듀레터' 및 '한우리독서토론논술 공식 블로그'에도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