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나를 깨우다≫는 ‘전국시대’를 살았던 장자가 남긴 말을 저자 이석명이 추려서 현대적 해설을 단 책이다. 나는 이 책을 7주에 걸쳐 찬찬히 읽었고, 읽는 동안 마음에 드는 구절을 따라 쓰며 그때그때 든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 8주 차에 접어든 지금, 에세이를 쓰기 위해 단상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그날의 내 기분에 따라 마음에 드는 구절이 제각각이고 단상 분량도 들쭉날쭉했지만,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의식을 깨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고 현실에서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때면 전보다 쉽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은 차이가 나를 한 뼘 더 성장하게 한 기분이었다.
나는 종종 남편이나 아이들이 한 말에 상처를 받곤 했다.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자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식의 대화가 이어질 때면 더욱 그랬다. 때로는 학생들이 무심코 한 말인 줄 알면서도 나를 무시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장자가 조삼모사를 예로 들어 ‘성심’ ‘천균’ ‘양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자,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내 태도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장자가 말하기를 성심은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다. 그래서 성심이란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아집과 같다. 이러한 아집을 깨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 집착하는 바가 없는 천균에 이르러야 하고, 대립하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수용하는 태도, 즉 양행이 필요하다. 양행은 시비 문제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시비 문제를 없게 하는 절묘한 방법이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서운함을 느끼거나 못마땅할 때가 많았다면 이는 내가 나만의 안경을 쓰고 상황을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나의 아집에 갇혀있는 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훈수를 뒀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한 것과 술을 자주 마시는 남편에게 무턱대고 잔소리를 늘어놓은 것, 모두 나만의 안경을 쓰고 바라본 결과다. 이걸 깨닫고 나니 앞으로는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 씀씀이가 조금 더 넓고 둥글어졌다.
장자가 쓸모에 대해 말한 부분도 크게 와닿았다. ‘쓸모’는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로 한때는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가 나의 좌우명이었다. 그런데 장자는 묻는다. ‘누구의 기준으로 나의 쓸모가 정해지는가?’라고. 이어지는 글에서는 ‘쓸모가 아니라 존재가치를 생각하라’며 ‘쓸모를 초월하는 자리에 머물라’고 답한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내가 생각한 쓸모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우위에 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주로 눈에 보이는 것들, 이를테면 성적, 외모, 스펙 등으로 나의 쓸모를 재단하였고 내면보다는 외면에 줄곧 초점을 맞춰 왔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노라며 이를 합리화했다. 그러나 장자가 말한 쓸모는 ‘내 삶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길’이다. 이는 정신적인 위안과 평안을 주는 유용성을 일컫는다. 물질주의에 따른 도구적 관점이 아니다.
쓸모의 기준을 다르게 놓고 보니, 사물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졌다. 크고 화려한 교목보다 그 주위를 감싼 관목에 마음이 갔다. 관목은 키가 작은 나무로 아파트 화단이나 길가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역할은 실로 대단하다. 작은 새들의 은신처가 되어주고, 사람들에게는 울타리 역할을 해준다. 빗물로 인해 흙이 유실되는 걸 막아주기도 한다. 눈에 띄는 건 은행나무, 단풍나무 같은 교목이지만 그 곁에는 묵묵히 이들을 돋보이게 하는 관목이 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와 쓸모의 기준을 새롭게 한 것만으로도 나는 장자의 말이라면 그대로 따를 만큼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런데 청출어람이라고, 저자 이석명이 책 마지막 부분에 한 말을 읽고 나자, 앞으로 이 세상을 더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채워지는 듯했다.
저자는 ‘결국 자신의 아픔과 상처는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최상의 치유법은 아예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일, 상처받는 일이 없으면 치유할 일도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상처받지 않으면 치유할 일도 없다는 단순 명료한 진리가 장자의 사상과 더불어 가슴에 콕 박혔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는다 해도 상처받지 않고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장자처럼 속세의 물욕을 완전히 벗어던지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고 시비분별을 하지 않는다면 정신적인 자유로움에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편안해지고, 내가 나의 쓸모를 알아차리며 가치 있게 살아간다면 상처받지 않는, 아니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스스로 해결 가능한 경지에 이를 것이다.
장자는 죽음은 태어남과 같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죽음은 두려움과 슬픔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죽음 또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고통의 무게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마음을 비운 채 후회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죽음에 이르렀을 때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나와 내 가족, 주변을 돌아보며 모든 것을 통과시키는 ‘문’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