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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닙 Mar 13. 2021

빠른 손의 저주

나, 8년 차 영상 디자이너

나는 유난히 손이 빠른 일꾼이다. 디자이너에게 손이 빠르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인데, 그것이 저주인 이유를 언급하자면 축복인 이유는 있으나마나가 되어버리므로 굳이 축복인 이유를 먼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손 빠른 디자이너의 고충에 대해 한 가지의 예를 들자면 일을 마쳤지만 아직 하는 척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인데, 빨리 일을 마치면 내 디자인이 "이미 완벽하다"는 반증이므로 끊임없이 수정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 내가 게으르지 않음을 입증해야 한다. 사실 같은 업무를 몇 년쯤 반복하다 보면 숙련도가 높아지기 마련인데,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디자인이라고 늘 새롭고 창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디자이너로서 사회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알게 된다.


어떤 주말에 나는 회사 동기들과 함께 눈치껏 회사에 출근했다. 비록 '디자인하는 척'이 비겁할지라도 주말 출근에 군말 없이 따르는 의리 있는 주말이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월화수목금금금 월화수목금'을 일하는 비운의 일꾼이 되었으며 평소 관심 없던 방청소가 시험기간 직전에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되듯이 독서, 영단어 외우기는 물론 심지어 그토록 하고자 했지만 포기했던 영상 디자인 프로그램 공부마저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To-do 리스트에 적었다.

주말 없이 한 주를 시작하자 누가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을 때 나는 한 주의 끝자락만큼 힘들었으므로 무조건 금요일이라고 답했다. 잃어버린 주말은 비록 하루 종일 침대에 뒹굴지라도 내가 여긴 가치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으며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나는 '이번 주말에 출근하지 않아도 될까'를 매일 생각하며 그다음 월화수목금요일에 야근을 했고, 마침내 그 주에 회사로부터 소중한 주말을 되찾았다. 한 주를 건너뛰었지만 주말은 여전히 게으르고 한가로운 모습으로 돌아왔으며 손에 들린 To-do 리스트는 홀랑 잃어버리고 없었다.


'눈치껏 하는 척'보다 힘든 일은 나 자신의 의지와 싸우는 일이다. 나는 스스로를 게으른 완벽주의자라 생각한다. 가장 큰 특징으로는 완벽할 자신이 없어서 할 일을 마감 끝까지 미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감을 지키지 못하거나 불만족하는 경우가 없으니 참 고치기 쉽지 않은 습관이다.


빠른 손은 산만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어릴 적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다소 산만한 아이'라고 적혔던 나는 정말 많은 취미를 배웠고, 가지고 있고 매일 아니더라도 계속하며 산다.

나는 결코 부자가 아니다. 돈은 모으는 것보다 쓰기 위해 버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부자의 취미'가 아니라 다만 이런저런 취미를 충동적으로 영위해본 '취미 부자'일뿐이라 아쉬운 글감이지만, 앞으로 써야 할 '취미록'에 각종 나의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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