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진 Sep 25. 2019

쮸와 나

제주도로 이주하게 된 이유

쮸라는 별명은 아이보다 7개월 먼저 태어난 사촌이 지어준 것이다. 사촌이 말을 시작할 때, 아이 이름을 알려주자 부르기 쉽게 쮸라고 부른 것이 별명이 되었다. 나는 좀 더 친근하게 '마이쮸'라고 부른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 까지는 자주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이따금 이용하는 첫 별명 또는 애칭이다.


각설하고,

아이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희귀 난치성 질병인 궤양성 대장염 환자였다.

이 병은 아직 치료제가 없다. 병에 걸렸을 당시엔 몸무게 14kg이 쭉 빠졌고(52kg->38kg), 극심한 복통과 하혈이 잦아서 곧 죽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지금의 남편을 다시 만나고 함께 살면서(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겠다) 당연히 아이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꾸준히 병원을 다녔지만 몸무게는 36kg으로 줄었고, 처방받은 새로운 약의 부작용으로 긴급 입원까지 했었다. 또한, 장기간 스테로이드를 복용하였기에 새 생명보다는 죽음이 더 가까웠던 시기였다.


그런 몸이었지만, 얼마 후 38kg을 유지하며 관해기(병증의 완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기간)에 접어들었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 아기는 2.34kg으로 태어났다. 당시 만삭의 내 몸무게는 48kg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코로 숨을 쉬게 되면서 숨소리가 고르지 못했다. 무언가 가슴(폐)에 찌꺼기 같은 이물질이 들어있는 것처럼 들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소리가 났다. 병원에 가서 물어보니, "돌 지나면 자연스레 없어져요. 폐가 아직 덜 자라서 그런 거예요."라고 알려주었다.

아이는 두 돌이 지나도 여전히 숨소리가 거칠었다.


이 시기에 나는 봄/가을로 극심한 인후염에 시달렸다. 몸무게는 38kg으로 돌아왔다.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틈만 나면 목이 붓고 열이 올라 아이를 데리고 거의 매주 병원에 다녔다. 아이와 병원을 다니는 것도, 거친 숨소리도, 나의 인후염도 지역적인 문제(미세먼지)라는 생각이 자라면서 제주로의 이주를 고민하게 되었다.


제주도엔 언니가 살고 있었다. 덕분에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살았었고, 남편을 만나 서울로 간 지 5년여 만에 언니의 도움으로 제주로 다시 올 수 있었다. 이 언니의 아들이 쮸의 7개월 차이 사촌이다.


기대를 품고 온 제주도는 5년 동안 무섭게 변했다. 건설붐과 늘어난 차량으로 인한 교통정체는 제주로의 이주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귀포에서 본 하늘이 이렇게 흐렸던가...

더구나 칼날처럼 날카롭던 수평선은 어쩌다 운 좋을 때 한번 볼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버렸다.

공기도 예전의 그 날것의 공기가 아니었다.

'내가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닌데...'


하지만, 서울(광명)보다야 공기질이 우리에게 괜찮은 것은 분명했다.

내려온 지 3개월 만에 아이의 가슴에서 나는 소리는 사라졌고, 병원 가는 횟수도 점점 줄었다. 나 역시 이듬해부터는 인후염이 생기지 않았고, 몸무게도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확실히 쮸와 나는 건강해졌다.

작가의 이전글 쮸와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