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는 무지개를 키우고

- 나에게 쓰담쓰담

by 바람

베이비부머 세대의 막내이자 일곱 남매의 막내. 집집마다 자식들로 넘쳤다. 초등학교에서 가정환경을 조사할 때면 자녀가 넷, 다섯은 자연스러웠다. 일곱을 말할 때마다 목소리가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일곱도 여럿 있었고, 간혹 여덟, 아홉이 나를 위로했다. 넘치는 아이들로 초등학교는 오전·오후반으로 나뉘었다.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었고 초등학교와 다르지 않았다. 굶어도 자식은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들이 지배하던 시대였고 부모 세대의 교육열은 높았다. 대학교육은 저 알아서 할 바였으나, 고등학교까지도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했다.


가족에 대해, 먹고 사는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는 막내였지만, 상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진학을 말하기에 앞서 내게 직장이 주어졌다. 대학은 낭만이었지만, 직장에서도 결이 다른 낭만을 즐겼다. 직장은 당시 처음 시작한 프로야구 구단을 운영했기에 경기장에는 프리패스로 들어가 관람했다. 콘서트며 연극도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었다. 작지만 다달이 나오는 수입으로 막내노릇도 고모노릇도 했고, 동료들과 어울려 늦도록 밤의 유흥을 만끽했다.


막연한 낭만이었던 대학생활은 지금은 남편인 남자 친구의 대학생활을 함께 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과제를 대신했고, 학교 밴드의 공연을 함께 즐겼다. 모두가 들떠 있던 축제와 술에 취한 캠퍼스의 밤의 문화, 종강 파티를 함께했다. 그리고 시위의 현장도. 짙은 최루가스 너머로 학생들의 분신, 울부짖음, 벽돌 시위, 용공좌경분자의 도피도 함께 했다. 미친 낭만이었다. 그렇게 7년의 직장생활과 나란한 연애를 마무리하고 결혼을 하였다.




당시는 용어도 생소한 밀레니엄이라는 말이 한창 미디어를 떠돌던 시대였다. IMF를 겪는 여진이 사회 구석구석 세찬 파도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이태백’은 이미 뒤쳐진 구식 용어였다. ‘오륙도’, ‘사오정’이라는 새로운 말이 유행처럼 맴돌았고 직장인들을 움츠러들었다. 불안정이라는 말이 세상을 지배하던 그 때,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대학에 문을 두드렸다. 세 번째 도전이었고 간절했다.


많은 날을 기도하며 진학의 간절함을 드러냈다. 남편과 다른 가족들에게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그렇게 아이들을 교육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대학을 다니겠다고 하는 좀 더 그럴듯한 명분이 더 있어야했다. 덧붙여 들이댄 것이 공부해서 어떤 길이 열릴지 모른다고. 그걸 발판으로 새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다고. 해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지나가는 말로 허락을 받았다. 기도가 닿았는지 합격이었다.


포장은 그럴 듯하게 했지만 대학 진학을 꿈꾸게 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초등학교 공부는 공부랄 것도 없었고, 중학교 공부는 안 해도 늘 잘 했다. 1등은 아니었지만 2등은 해 봤고, 칭찬이 없어도 참고서나 자습서를 사 주지 않아도 교과서만으로 제법 했다. 문제는 고등학교였다. 학교까지는 버스로 편도 한 시간 반 거리였다. 구로구 독산동에서 성북구 성북동까지 중간에서 버스를 갈아타야했다.


길눈이 어두웠던 나는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을 지나칠까 두려웠다. 항상 같은 곳에서 내리고, 타던 버스만 탔다. 아무리 일찍 나와도 학교 도착시간은 지각생 잡기 일보 직전이었다. 버스에 내려 언덕을 오르면 수위실, 한참을 더 오르면 교무실, 또 한참을 오르면 운동장이 나왔고 그곳에서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가면 교실이 있던 건물이었다. 졸업 후 꿈에서도 악몽으로 걸어 올랐던 그 곳은 지금도 손바닥 눈금처럼 선명하다.



상업계 학교에서의 학과 공부는 자격증이 절반이었다. 학교 계획에 맞게 졸업생을 취업시켜야 했고 계획에 따라 어느 단계에서 어떤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그 단계에 끌려가듯 따라갔다. 당연히 교과 공부는 할 수가 없었다. 원래도 집에서 공부란 것을 따로 하지 않았었다. 적어도 중학교 까지는. 그런데 고등학교에서는 그렇게 안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처음 성적은 중반으로 다음은 그보다 좀 더 아래, 그 다음은 그보다 더. 바닥을 모르고 내려갔다. 급기야 졸업할 때의 성적은 차마 말로 담기 힘들 지경이었다.


대학 입학은 나의 마지막 학생부의 성적을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서였다. 그 성적으로는 애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엄마의 자격 이전에 사람의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어디에도 내 보일 수 없었고 누가 볼까 두려웠다. 마지막 생활기록부 성적을 확 바꾸고 싶었다. 기필코 바꿔야 했다. 여러 번의 도전, 간절한 기도, 그럴 듯한 설득 모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성적을 지워버리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였다.




나만의 공부 방법이란 애초에 없었다. 설령 있었다 해도 잊을 만큼 시간이 지나 있었다. 어차피 다시 시작이었다. 최선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항상 계획이 서 있었고 그대로 실행했다. 공부는 책과 씨름한 시간에 비례할거라는 대책 없는 사실을 믿었다. 누가 이기나 붙들고 매달렸다. 쓰고 또 쓰고, 정리하고 다시 정리했다. 늘 수첩을 들고 다니며 봤고, 보지 않아도 들고 다녔다.


대학을 졸업했다. 학과 우수상을 받으며 졸업했고 여세를 몰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교원자격증을 받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니 처음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제시했던 명분대로 새로운 길을 열기도 했던 셈이다. 나에게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내 마지막 생기부의 성적을 누구에게든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아들과 딸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성적 개조를 위해 노력했던 나의 지난한 과정을 마음을 다해 설명했다. 꽁꽁 숨겨왔던 엄마의 바닥을, 그 거친 자락을 펼쳤다. 그렇게라도 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딸은 생기부의 성적이 바닥인 채로 인생의 마지막 성적표를 마감할 수 없었다는 대목에서 웃겼다고 했다.


이제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었다. 넘치는 숫자만큼 은퇴의 행렬도 넘쳐 은퇴의 도미노라고 위협처럼 불리는 세대. 나는 그 세대의 문을 닫고 나왔다. 새로운 전환점이다. 어떤 도미노가 완성될지 모르겠다. 이왕이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이 멋지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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