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김치를 담가야겠다'고 번뜩 생각하는 때가 있다. 유독 배추나 알타리가 나를 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다.
순간 적당히 익어 한 입 베어 물면 김치의 매콤하고 짭조름하며 시원한 간이 무의 아삭함과 함께 느껴지거나, 노란 속잎을 감싼 푸른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고 적당히 빨갛게 버무려져 내돈내산, 내 작품이 되어 가족의 입맛을 모두 충족시키는 그림이 무작정 그려진다.
그런 날은 김칫거리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 적당한 가게를 발견하면, 누가 발을 붙잡은 것처럼 그대로 멈춰 서서 배추와 알타리를 고르고 있고 어느덧 결제까지 끝내곤 한다.
이렇게 시작된 김치 담그기는 한 두 달은 그 재미와 감동이 이어진다. 그렇게 한동안은 꾸준히 홈메이드 김치가 식단에 오른다. 이때가 바로 나의 김장 시즌이다.
하지만 그러다 마음이 또 차갑게 식는 순간이 있다. 언제 김치를 담가보았던가 싶게 낯설고 귀찮고 심드렁해지면 나의 김장 비수기가 찾아든다. 그럴 땐 온라인을 뒤진다. 김장 시즌이었던 여름이 끝나고 남은 김치가 동나기 시작하는 불과 며칠 전,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했다.
맛있다고 하는, 집에서 담근 것 같다고 하는, 깨끗하고 포기가 실하다고 하는 김치 제품들을 리뷰를 일일이 보아가며 검색하고 일사천리로 주문까지 완료했다.
주문을 하고 이틀인가 지났을 때 배춧값이 한 포기에 만 원이 넘는다는 기사를 접했다. 미리 주문하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관련 기사를 훑어보니 쪽파는 2만 원, 깻잎은 한 장에 150원이라며 '채소대란' 소식을 전한다.
추석 명절이야 으레 비싼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깻잎을 한 봉에 2천 원 주고 샀을 때는 양이 너무 적어서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그런데 돌아보니 그때가 양반이었다니. 먹고사는 문제에서까지 우리의 현실은 정말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것 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채솟값 폭등의 충격을 전하며 관련 사진으로 양배추가 산처럼 쌓인 매대를 보여주었다. 다분히 의도가 보이는 보도 행태가 아닐 수 없었다. 양배추 김치가 유산균 폭탄이라나 뭐라나, 양배추로 김치가 맛있다나 어떻다나 떠들어 댔다.
정부에서는 임시방편으로 중국산 배추를 들여와 도매 시장에 풀기로 했다고 하고, 또 김장을 담그는 시기를 2주 늦춰달라고 했다는 말도 들렸다.
언제나처럼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야 수습하는 모습. 정부가 국민의 삶을 위해 계획이나 대비 등의 역할을 하고는 있는 건지, 이제는 질문하는 것도 지친다.
기사에서는 농수산식품유통공사 가격정보(KAMIS)를 보여주며 지난해에 비해 깻잎 13%, 적상추 45%, 오이와 풋고추 15% 인상이라며 꼼꼼하게 수치화했다.
사실 일반 소비자, 나 같은 주부는 그런 지수를 외면한다. 바로 어제에 비해 엄청나게 올랐고, 내일은 더 오를 것이 분명한 사실을 확인하고 가벼운 주머니와 씁쓸한 마음으로 채소 가게를 지나칠 뿐이다.
한때 사과를 비롯한 과일값 폭등으로 온통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매일 먹는 사과가 삶의 낙이었다는 사람은, 사과를 아껴먹어야 하는 상황이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고 했었다.
우리 집도 다르지 않았다. 삶의 낙은 아니었어도 안정적인 식생활의 루틴 같은 것이었는데 과일을 포기해야 하나 위기감을 느꼈더랬다. 결국엔 '금사과'를 포기하고 조금 저렴한 다른 과일로 갈아타야 했지만.
사과 이전엔 외식값의 상승이 충격이었다. 외식이라고 해서 소고기 스테이크를 파인 다이닝에서 먹는 것도 아니건만, 동네 밥집이나 자주 가던 맛집을 들를 때마다 천 원 단위의 가격이 매번 바뀌는 것을 보았다.
나중엔 그러려니 하고 기막혀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맛있는 한 끼 백반이나 한식 뷔페가 단번에 30-40% 인상되는 건 흔히 보는 광경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가격표가 바뀌는 중이지만 더는 놀라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장사하는 입장에서 그럴 수 있지, 이젠 여기 안 오면 되지', 생각한다.
지난 2일 통계청은 2024년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6%라고 발표했다. 3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1%대 진입이라며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모양새였다. 1%의 하락을 이끈 것은 석유류 물가로, 7.6%가 하락하며 전체 물가 하락을 이끌었다고 덧붙였다.
소비자 물가 지수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높지 않다는 것이 정부나 정책 입안자들에게는 국민의 눈을 가리기 좋은 재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배추는 53.6%, 무는 41.6%, 상추는 31.5% 올랐다는데, "물가가 하향 안정세로 자리 잡는 모습"(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라는 평가는 전문성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인간성까지 의심하게 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정상적인 판단인지 진지하게 양심에 따져묻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국민들은 먹고사는 것이 큰 시름인데, 대통령실과 여당 지도부가 차례로 세를 과시하듯 만찬을 즐겼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 만찬이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지는 차치하고, 저들끼리 세를 과시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정치의 본질일까 묻고 싶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쓴 책 <여보, 나 좀 도와줘>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한 사회의 가치관이 거꾸로 서 있거나 가치 판단이 흔들릴 때, 잘못된 양심을 가진 사람의 지식은 어떤 도둑질이나 살인보다도 위험한 범죄'라고. 또한 ''철학'이 없는 정치인은 '두목'이라는 말은 들을 수 있어도 '지도자'라는 이름을 들을 수는 없다'라고. 지금 우리는 '지도자'가 없는 나라에 사는 것 같다.
여하튼 정부가 김장 시기를 늦춰달란다고 해서, 그때까지 김치를 먹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전에 뭐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 도매시장에 갔다. 알타리 한 단에 오천 원,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곧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단이라고 묶인 알타리는 무가 7-8개 달린, 평소의 1/3 수준 묶음이었다. 가격은 비슷하나 양을 확 줄인 것. 의도가 빤히 보이는 얄팍한 수에 헛웃음이 나왔다. 다섯 단을 담가도 평소 담그는 양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따져 보면 가격은 평소의 3배 이상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나마도 몇 단 남아있지 않았다. 비싼 가격에 속은 상해도, 사려면 사 올 수는 있었다. 맛있게 김치를 담가 먹으면 쓰린 마음을 조금은 달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개를 돌렸다. 며칠 후 그나마도 아쉬운 마음이 들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이 억울한 마음으로 사고 싶지는 않았다.
억울함은 '애매하거나 불공정하여 마음이 분하고 답답하다'는 의미다. 알타리를 앞에 두고 가격에 대해 고민하는 상황이 애매했고 불공정하다고 느꼈다.
답답하고 분하기도 했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억지로라도 사야만 하는지, 이런 갈등을 겪어야 하는지 억울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을 만든 정부와 관계자들의 태도에 대해, 그들의 무심함과 안이함에 대해 분노했던 것 같다.
유튜브 방송에 한 상인이 나왔다. 자신의 가게 주변의 상가가 하나씩 비어 가는 상황에 대해 말했다. 자신도 멀지 않았다고 했다. 옆에 앉은 진행자는 자신이 사는 지역도 마찬가지라며 조심스럽게 호응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집 근처 상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나 걸러 한 점포씩 손님이 없어 오래 썰렁하다가 어느 날 문을 닫고 내부가 정리되고 임대 팻말이 붙는 과정, 그 기억이 마치 눈 앞에서 슬라이드처럼 지나갔다.
서민이 느끼는 현실은 수치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확연히 다르다. 억대의 세비를 받고 법인 카드로 생활비를 쓰고 권력자와 친해서 공공 기관에 낙하산 취업하고 또 억대의 연봉을 받으면, 그런 사람들 눈에는 이런 현실은 아예 보이지 않는 걸까? 오늘도 억울한 마음만 한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