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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 만 세

작가 정신을 차리게 만든 책, 무슨 내용이길래

최진영 소설집 <팽이>

by 바람

얼마 전 최진영 작가의 북토크에 참여했다. 강연과 질의가 이어지며 글 쓰는 사람의 감성은 남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던 것 같다. 특히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의 감수성은 현실을 실제보다 더 진하게, 깊게, 다층적으로 흡수하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첫 소설집 <팽이>를 내기까지 오래 걸린 이유에 대한 작가의 답변에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고립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기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여기에 더 머무르려고 했었죠. 희망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책이 나온 것 같아요."


소설집 <팽이>는 당시 상황을 허구의 이야기로 써서 작가의 내면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창작 동기를 듣고 나서 작품을 읽은 감상을 말하자면, 사회적, 경제적 고립의 상황을 떠올릴 수 있는 어떤 막연한 상상보다 작품의 내용은 더 구체적이고 제각각 충격적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작품 속 인물들의 대응 방식은 지극히 내면적이며 소극적이라는 것이 오히려 충격을 크게 한다. 소설 속 각각의 인물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무수한 고통을 오롯이 감내하는 모습이라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의 목소리와 하나가 되며 숨을 멈출 수밖에 없다.



어지럽고 낮달처럼 흐릿한 현실


작가 스스로 자신을 놀라게 한 책이고 정신을 차리게 한 책이라는 말도 이해가 간다. 아버지는 없고 엄마마저도 외국으로 떠나고 남겨진 두 남매의 이야기 '팽이'는 토성의 띠같이 돌아가는 팽이처럼 어린 남매의 어지러운 현실을 보여준다. '언제', 어떻게', '왜'가 없(어야 하)는 남매의 삶은 낮달처럼 언제나 흐릿하다. 자신의 집을 찾아 떠난 엄마의 바람처럼 행복할 수도 물론 없다.


'병든 새끼를 낳으면 물어 죽이는 어떤 개'와 '새끼가 다 크면 발톱을 세워 쫓아내는 고양이'에 대해 말하는 오빠의 말은 남매의 처지에 대한 궁극의 비유 같다. 사방에 슬픔이 넘실거리지만 남매의 대화는 담백하다 못해 차갑다. 그런 상황에서 남매의 입에서 나오는 욕설은 더럽거나 상스럽지 않고 다만 아프다. '모두들 고민했고, 모두들 극복했고, 모두들 나아졌다'는 희망은 언제나 막연하지만, 소설은 한 아이가 무너짐 없이 세상을 버텨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점됐던 시간만큼 우리 부부는 함께 살아왔다. 긴 시간이 준 교훈이라면, 부부는 사랑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깊어지는 사이라는 생각이다. 마주 보는 것보다는 두 손을 맞잡고 앞을 향하는 것이 더욱 어울리는 사이. 그러나 사랑처럼 믿음도 근거는 막연하고 나약하다는 것이 언제나 함정이다.


단편 '남편'은 성실하고 착했던 남편이 한순간에 강간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아내의 믿음은 흔들리고 한때 견고했던 부부의 관계가 무너지는 이야기다. 남편의 혐의와 함께 아내에게 닥치는 상황은 이전의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기에 충분하다.


아내를 향한 주변의 시선은 가히 범죄자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의심이 소문을 만들고 소문은 어느새 진실이 되어버리는 상황에서 정작 진실은 감쪽같이 형체를 감춘다. 가난하지만 성실했고 서로를 신뢰했던 부부는 한순간에 범죄의 수렁에 갇혀 무너진다. 사랑도 신기루지만 믿음도 신기루가 되는 상황이다.


종일 박스를 들고 뛰어다녔을 그의 손을 매만지며 지구의 절반을 뒤덮은 도미노 조각을 떠올렸다. 하나의 조각이 다른 조각을 쓰러뜨리기엔 그 사이가 좀 멀어서, 남편과 나는 조각 하나하나를 툭툭 치며 도미노를 완성하는 중이다. 도미노가 다 넘어지면 끝내주는 그림이 완성될지도 모르지만, 그 그림이 우리와 무슨 상관있을까. 도미노는 내려다봐야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알 수 있지 않나. 남편과 나는 도미노를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위로 올라갈 수 없다.('남편')


월세를 감당하기 힘들어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한 아내와 하루 종일 택배를 돌리며 새벽에 나가 밤늦게야 돌아오는 안쓰럽고 애달픈 남편.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곳은 환상이 되고 현실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누구도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의심과 진실, 소문과 믿음 사이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에서 찢긴 감정은 억울함으로 남을 뿐이다.


작품은 남편을 보통의 서민으로 가장한 악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그러나 권력이 기존 질서를 합리화한다는 명분으로 끝없이 아내를 세뇌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내를 향한 주변인들의 집단적 행동도 다르지 않다. 그들의 냉대와 질시는 개인이 지닌 본성보다 냉혹하게 표출된다.



모두 일정하게 슬픈 10편의 단편


IE003530368_STD.jpg ▲책표지 ⓒ 창비관련사진보기


최근 국회에서 관봉권 띠지 분실을 두고 연일 청문회가 열리며 언론을 달구고 있다. 문제의 관봉권은 경찰이 무속인 '건진법사' 전성배씨에 대해 서울남부지검에서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된 현금으로, 당시 돈의 출처와 사건의 흐름을 증명하는 증거지만 일각의 눈은 관봉권이라는 돈 다발 그 자체에 있는 것 같다.


소설 '돈가방'은 형제 부부가 부모님의 산소에서 3억 원이 든 돈가방을 발견하며 시작되는 갈등을 그린다. 관봉권 논란에서도 그렇듯 돈은 인간의 욕심과 바닥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지만 사업 상 늘 돈이 필요한 첫째 부부와,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둘째 부부. 그러나 증거도 증인도 없는 주인 잃은 돈 앞에서 가치관은 흔들리고 인간다움의 실체는 사라진다.


10편의 단편은 모두 일정하게 슬프다. 대체로 어둡고 일그러졌으며 채도가 다른 서민의 삶이 펼쳐진다. 삶은 '온전히 기쁘고 행복하기란 정말 힘들('주단')'고 사람들은 '공개할 수 없는 하루 치의 불행을 탈탈 털어 옷장에 개켜 넣으며 하루하루를 살('창')'아가는 모습들이다.


"팽이를 돌려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팽이가 가장 빨리 돌아갈 때 멈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사실은 가장 빨리 돌아가는 걸 수도 있다는 의미죠. 멈춰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사람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어요." (최진영 작가 북토크에서)


소설은 서민들의 패를 모두 뒤집어 보인다. 어떻게든 살아내는 그들의 생명력 앞에 어떤 수사도 가치 없게 느껴진다. '절박한 사람들에게 더욱더 아무것도 주지 않는 세상'에서 그들은 다만 바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잘 사는 게 뭔지, 잘 사는 것과 잘 쓰는 것이 어떤 관계인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잘 쓰고 싶다.(2013년 9월)"는 작가의 말은 그 어떤 말보다 작가에게 굳은 신뢰를 품게 한다. 나 역시 잘 사는 건지 불분명한 매일을 살아간다. 다만 부단히 읽고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이 지금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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