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금이라면 전 돈을 벌었습니다.
올 들어 슬슬 아빠에게 원두 전동 그라인더를 사자는 압력을 넣고 있었으나 사정상 중단되고, 당분간은 포기하고 있던 차에 이를 선뜻 사주겠다는 의인이 나타났다. 의인은 놀랍게도 우리 엄마.
이 일이 놀라운 이유는 엄마의 기호성이다. 엄마는 대형 식품회사의 기획실> 연구실> 공장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 거친 레시피를 따라 만들어진, 맥심 모카골드와 카누 바닐라라떼가 아니면 들지 않으시며, 내가 내린 커피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처음 들어온 커피 관련 전자제품은 수년 전 엄마께서 급히 손님 대접용으로 마련하신 필립스 커피메이커였다. 한번 쓰고 방치되어있다가 (아무도 손대지 않아 조용히) 버려질 위기에 처한 원두를 내가 감지한 것을 계기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어떻게든 처치하는 것이 목적이었던지라 원두를 믹서기로 갈아서 잘 내려마셨다.
몇 년 후, (독일에서 1년을 보낸 후) 난 나보다 독어를 잘하는 사람이 없는 기회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때마다 명예 독일인을 자청했다.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나 자신조차 속일 수 있었고, 원두를 믹서기 칼날로 분쇄하는 것은 (독일인 뼛속 깊이 자리하는) 마이스터 정신에 어긋나는듯해 점차 꺼리게 되었다.
하지만 마이스터 정신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핸드밀을 구입하기에 이른다. 하나 상품 상세페이지를 면밀히 읽지 않아 꽉 채워 넣어도 한 번에 겨우 원두 14g을 갈까 말까 한 귀여운 친구를 마주하게 됐다. 모카포트를 사용할 땐 14g만 갈아도 충분했다. 심지어 바로바로 원두를 갈아 마시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줄 아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된 기분에 젖기도 했다. 이 조그만 녀석은 삼십만 원을 호가하는 핸드밀인 코만단테와 유사하게 만들어져 다이얼로 원두 굵기도 조절할 수 있어 요리조리 굵기를 달리해가며 하루에도 두세 번씩 원두를 갈아냈다.
모카포트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텁텁한 커피에 싫증이 날 때쯤 핸드드립으로 눈을 돌렸고, 운명처럼 독일의 한 화학자가 커피의 아로마 유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했다는 케맥스(chemax)를 만났다. 문제점이 하나 있다면 케맥스 커피를 완성하는 건 케맥스 전용 커피필터인데, 이 (환경파괴에 앞장서는) 커다란 종이에 겨우 커피 한 잔을 내리자니 한없이 인색해지며, 무조건 두 잔 분량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심히 고되다. 커피를 내릴 때마다 매번 상온의 670ml의 물이 끓기 전까지 37g의 원두를 갈아내야 하는 경주를 벌이느라 두 팔을 멈출 수 없었다. (물론 빨리 갈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런 마음으로 임하게 된다.) 이를 위해선 앙증맞은 핸드밀을 채우고 비워내고를 두세 번 반복해야 했다.
일 년이 흐르고 얼마 전, 세명의 친구를 집으로 초대한 어느 날, 사랑방에 손님들을 들이고 난 차가운 부엌을 서성이며 70g에 육박하는 원두를 핸드밀과 물아일체가 되어 갈아냈다.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갈아낸다. 하지만 친구들과의 시간을 포기하고 내린 게 무색하게 뜨거운 물이 지나가고 필터 위에는 진흙 같은 원두가 남았다. 그날이 돼서야 핸드밀이 크기 조절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방 안에서 대접한 커피는 너무나 썼다.
최근 또 새로운 원두를 사들이면서 자연스레 원래 있던 원두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이 원두는 모카포트용으로 갈아놓자는 심산으로 오른손으로 돌리고, 왼손으로 돌리고, 오른손으로 ••• 이를 무한 반복하던 내 맞은편에는 엄마가 앉아계셨다.
엄마께서는 비언어적 표현으로 중간중간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으셨고, 급기야 언어적 표현까지 동원하셨다. 흑심 없이 ‘5만 원대의 전동 그라인더가 있다면 3초면 될 텐데••• 엄마가 사죠!’라고 내뱉자 ‘사.’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생각해보니 내가 핸드밀로 원두를 갈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엄마께선 일관되게 미간을 좁히시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훑어보곤 하셨다. (하지만 k-daugter에겐 아무런 데미지도 입히지 못했다.)
그날 저녁, 전동 그라인더가 있다는 취급한다는 오프라인 상점에 시장조사 차원 겸 방문했다. 이미 한참 전에 조사를 마친 터라 여차하면 온라인으로 주문해버리겠다는 깐깐이는 가게에서 운명처럼 보덤 그라인더를 마주했다. 맷돌 방식의 원뿔형(conical burr) 날에, 호퍼까지 갖춘 모습은 내 기대 그 이상에 부응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새 그라인더 생각에 설레 일찍 눈이 떠졌다. 바로 10초 만에 원두를 갈아내는 ❤보더미❤를 보며 한번 감동, 균일한 입자가 만들어낸 커피 맛에 또 한 번 감동하여 이렇게 기념하기로 결심했다.
글을 마치며•••
드립 커피를 마시는 아빠와 나보다 더 빠르게 구매를 결정하셨던 엄마를 떠올리니 어쩌면 부정적인 게 긍정적인 것보다, 수동적인 게 능동적인 것보다 빠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빠른 것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며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물론 나의 경우는 내 자의가 아니라 강제적으로 지양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감사를 잊지 않아야 하므로 이 글을 마치고 다시 한번 엄마께 감사의 말씀을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