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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Feb 11. 2021

코로나 시대의 취미찾기

커피맛을 아는 성인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시킨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 4000원이 넘는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그 커피는 무조건 맛있는 커피이며, 만약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나의 미각의 잘못이다.


본격적으로 커피에 눈을 뜬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오전 수업이 있는 날, 그러니깐 거의 매일 아침,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없는 날은 그날 배운 내용을 독학해야했다. 맛은 상관없었다.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고, 오히려 쓰면 쓸수록 값어치를 하는 듯해 보였다.


아무 문제없이 사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건 뜻밖에도 헌치브라운 사장님이었다. 프랑스에서 배워오신 초콜릿 템퍼링 기술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은 진열해둔 모든 초콜릿의 정체를 캐묻는 김정수의 모습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는 그의 모습에 반가움을 느끼신 듯 했다. 은정과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다 사장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테이블로 가 앉았다. 사장님은 주문한 것에 더해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파베초콜릿을 주셨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 초콜릿은 한 입에 먹어야하며, 다 먹어갈 때쯤, 커피를 한 모금 마셔 단맛을 중화시키고, 입안에 은은한 커피향이 남겨지도록 마셔야한다고 일러주신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은 쓴 커피가 좋은 커피인 줄 알지만 사실 원두를 태우거나, 너무 오래 보관하면 그런 맛이 나는거라며 은근히 스타벅스를 견제하셨다. 배움도 좋고 초콜릿도 좋지만 원래의 목적대로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라고 생각된다.


커피와 적당한 선을 지키며 관계를 유지했다. 일반적인 관념에 맞는 커피라면 불평하지않고, 마다하지 않는다. 시험기간에는 바짝 가까워졌다가 다시 서로 예의를 지키는 그런 관계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난 독일에 있었다. 독일에서 나는 몸집이 거대한 유아로 돌아갔는데, 단어를 잘 떠올리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등 말을 잘 못한다는 점, 어떻게, 어떤 끼니를 챙겨먹을지만 고민한다는 점, 그리고 작은 일에도 흥미를 보이고, 여차하면 따라하는 특성을 보였다. 플랫메이트였던 이름이 잘 기억나지않는 에릭은 항상 아침 7시면 플랫을 나섰다. 그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희미한 커피향과 매우 독한 콜롱향(분자들이 입으로 들어와 맛이 느껴진다. 맛없다.)이 남아있다.이러한 이유로 그가 플랫에 들어오고 나가는 건 말그대로 눈감고도 알 수 있다. 아무튼 하루 일과를 커피로 여는 그를 보고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아침이면 훌륭한 가성비를 자랑하는 제이콥스 커피를 두어잔 타 마시기 시작했다.


여행지에서는 커피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예상치못한 상황을 맞닥뜨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그 곳에선 나의 인성은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치기일쑤였고, 귀납적으로 빠르고 효과적인 해결책으로 커피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내 입에 흘러들어간 그 커피들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나는 당시 나의 인성과 몰염치한 행동에 대한 수치심으로 대인기피증에 걸렸으리라. 미처 커피를 마시기 전 나의 인성을 본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송구스러울뿐이다.


최고의 카푸치노는 벨기에 기차역에서 우연히 마셨다. 잊혀지지 않은 그 경험은 나로하여금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찾아나서게했다. 독일 생활의 거의 막바지쯤 그 커피를 만났는데 이는 베를린 19그램이라는 카페에서였다. 따뜻한 커피도, 차가운 커피도, 라떼도 모두 예외없이 부드러운 신맛을 낸다. 마지막 날 난 원두 한 봉지를 손에 꼭 쥔 채로 베를린에서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에 돌아와 마신 그 커피는, 어떻게 만들어도 맛있었고, 자연스럽게 나를 아무 커피나 마실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저학년때 방문한 후, 약18개월의 세월이 지나고 다시 헌치브라운을 찾았다. 사장님께 신맛이 나는 가벼운 커피 추천을 부탁드렸고, 사장님은 서비스로 파베초콜릿을 들고오시며 과거를 재현하신다. 한국인들은 신 커피면 무조건 좋은 줄 안다는 말로 입을 여시며 신맛은 카페인이 과다방출되서 그렇다며 한국인의 고정적인 입맛을 꼬집으셨다. 하지만 나름의 긴 과정을 거쳐 터득한 나의 취향은 확고하다. (헌치브라운의 커피는 물론 맛있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집안에 남겨진 나는 수입도 없으면서 돈 쓸 궁리를 골똘히한다. ‘커피에 돈을 써야겠어!’. 컵도 사다나르고, 생각보다 작은 핸드그라인더도, 미디움 로스팅 된 케냐AA 원두도 도착했다. 신나서 커피를 마셨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커피를 좀 더 알아가기로했다. James Hoffmann은 섬세하다. 그는 커피 전문가이지만 아는체하지 않고 부드럽게 커피에 대해 알려준다. 젠틀한 목소리와 섬세하고도, 집요한 그의 탐구정신에 그의 영상을 볼때면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다. 물과 원두의 비율, 어떤 물을 써야하는가,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전 잔을 돌려섞는게 나은지 스푼으로 저어섞는게 나은지 등에 대한 영상을 보자 그를 신뢰하지않을 수 없다.


아무튼 그의 영상 중 하나는 집에서 커피 시음, 즉, 컵핑(cupping)하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비교였다. 여러 원두를 두고 비교하며 그 향, 맛, 바디감 등을 느끼고, 자신이 어느쪽을 더 선호하는지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자극받은 나는 무지몽매지만 내 나름대로 컵핑을 해보려고, 3가지 다른 종류의 원두를 주문했다. 인도,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원두가 월요일에 갓 로스팅되어 우리집에 도착한 화요일 오후, 아뿔사 때마침 희망 회사의 채용공고가 올라온다.


컵핑을 잠시 미뤄두고 다시 적성검사 문제집을 들춰보고있노라면, 여행지의 까칠했던 나보다 약 218.75배정도 화가 나 있는 나를 발견한다.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인지 내 앞에 닥친 장애물을 못본척하고 싶어서인지 자꾸만 커피가 마시고싶다. 이 글은 도형추리를 풀다 화가 나 작성하는 글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다시 돌아가 나의 본분을 다할 것을 약속하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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