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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하 Sep 12. 2023

임산부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

쪼하의 커리어 이야기

임신 7개월 차에 들어섰다. 배도 제법 나왔다. 이제는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면 앉아있던 사람들이 저절로 비켜줄 정도로 태가 난다. 지금 회사에 들어온 지는 3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렇게 난 임산부이자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임신 초기에 프리랜서로 활동한 때와 비교하면 직장에 다니는 편이 더 만족스럽긴 하다. 그때는 입덧에 갑상선 항진증까지 겹치는 바람에 도저히 뭘 할 수 없는 컨디션임에도 '커리어가 끊길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때도 이직을 준비하느라 계속 사람을 만나긴 했지만 안정된 소속이 없다는 게 적잖이 울적했다. 어렵사리 일궈놓은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소속이 있는 현재, 심적으로는 안정된 기분이다. 올 연말이면 아이를 낳고, 그 이후에는 내 이름 석자보다는 'OO이 엄마'로 불릴 날이 더 많을 것을 알기에 내 이름 석자로만 불릴 수 있는 나날을 최대한 늘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기에 "하루라도 빨리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는 주변의 걱정에 "막달까지는 일하려고요"라는 대답을 내놓곤 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 느낄 법한 초조함을 느끼며 살고 있다. 육아휴직 들어간 이후에 내 이름이 잊히지 않도록 한 명이라도 더 만나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실적을 내야 하는데, 글을 한 편이라도 더 써야 하는데, 외국어 공부를 하루라도 더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들이 밀려든다.    


이런 마음가짐과는 다르게 홀몸이었을 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다. 임산부가 이토록 여러 사람의 배려를 받아야 한다는 걸, 임신하고 나서야 알았다.


대표적으로 대중교통을 탈 때다. 임산부 배려석에 나이 드신 분이 앉아있을 때가 가장 암담하다. 괜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제가 임산부라서요..."라고 말을 꺼내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 과정에서 폭언을 들은 적은 없으며 오히려 상대방이 미안해하면서 비켜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힘없는 걸음으로 자리를 옮기는 뒷모습에, 그리고 아무도 그분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모습에 살짝 울컥할 때도 있었다.  


자리를 양보받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임신 5개월 차였을 때 웬 할아버지 한 분이 버스에 타자마자 내 앞에 섰다.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다른 30~40대 승객 중 누구도 그분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그 할아버지는 도통 내 앞을 떠나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에 결국 자리를 내어 드렸다. 또 한 번은, 전혀 임신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인데도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자리 좀 양보해 달라"는 내 말에 모르쇠로 대꾸했다. '다들 저출산이 위기라는 인식은 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사소한 배려들이 더 많기에 어찌저찌 직장 생활을 잘 이어나가는 듯하다.


임신 전의 컨디션처럼 일을 하면 금방 체력이 축 나는 것도 좀 속상한 부분이다. 나는 여기저기 사람을 만나러 돌아다니는 기자였고, 홍보가 된 지금도 그 네트워크 관리를 위해 여기저기 외부 미팅을 다닌다. 그러다 보면 적게는 5000 보, 많게는 1만 보까지 걷기도 한다. 이전에는 '오늘 운동 좀 했네' 정도였다면 지금은 '오늘 운명하겠네'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육아휴직 전까지는 최대한 네트워크를 다져놓고 싶다는 건 내 욕심일까?


이처럼 커리어 욕심이 앞서서일까, 가끔은 나쁜 엄마인 것만 같다.


일단 산모 교실 등 출산 전에 알아두면 좋을 내용을 알려주는 수업들은 대부분 평일 낮에 진행된다. 직장인이라면 들을 수 없는 시간이다. '조리원에서 잘 알려주겠지'라는 마음으로 짐짓 웃어넘기지만 한편으론 불안감이 싹튼다. 이렇게 출산 준비에 소홀해도 될까 싶어서다.


최근 또 나쁜 엄마가 된 듯한 기분이 드는 일이 또 있었다. 임신 당뇨 수치가 기준치보다 높게 나와 재검사를 받으라는 전화를 받고 나서였다. 임신 당뇨가 뱃속 아이에게 미칠 영향보다도 당장 내 컨디션에 이상이 생겨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떡하냐는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그간 임신 당뇨를 예방하기 위해 꾸준히 걷고 절대 야식은 먹지 않고 하루 세 끼도 최대한 건강히 먹으려던 노력이 헛수고가 된 듯한 억울함이 더 컸다.


육아 게시판을 보면 다들 자기 아이에 대한 사랑과 걱정이 지극하던데 나는 그렇지 못한 듯해서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임산부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배려받아야 하면서 아이를 우선시해야 하는 '임산부'와 최대한 동료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으면서 나 자신의 커리어를 더 우선순위에 올려놓고 싶은 '직장인' 그 중간에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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