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의 이상과 현실, 그 간극에 고통받다- 4편.
만약 당신이 결혼 적령기에 속한 가정적인 성향의 여성이라면 새로운 산업에 뛰어들기 전에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라고 권유하고 싶다. 신산업에서 1년 가까이 워킹맘으로 살아본 결과, 가정보다도 커리어에 훨씬 더 큰 가치를 두어야만 버틸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맞벌이에 양가 부모님 도움도 없고 시터도 쓰지 못한 내게는 젊은 사람들이 많고 해외 업체들과 교류가 많은 웹3 업계의 문턱이 너무 높았다.
내가 몸담았던 웹3(블록체인, 가상자산 등을 포함) 산업은 2030 세대가 주축이 되는 스타트업들이 주를 이룬다. 다른 산업보다도 임직원들의 나이가 어린 편이며, 그들 중 대다수는 챙겨야 할 가정이 없다. 20대의 내가 그랬듯이 밤낮없이 업무에 매진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정에 매여있지 않기에 저녁 시간을 활용해 비즈니스 미팅을 하거나 직원들끼리 단합을 도모하는 일도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웹3 업계에는 유독 저녁 밋업 자리가 많다. 국내 웹3 업계의 대표적인 행사 중 하나인 코리아 블록체인 위크(KBW)가 열리는 기간에는 한 주 내내 여러 국내외 업체들의 부대행사가 새벽까지 이어지곤 한다. 부대행사에 참여하면 해외 업체 사업개발 담당자들과 안면을 트고 추후 비즈니스 미팅을 잡을 수도 있다. 적어도 웹3 업계 내 인맥이라도 넓힐 수 있다.
그렇지만 고양이 손조차 빌릴 수 없는 아이 엄마라면? 저녁 밋업이고 나발이고 버스 놓쳐서 어린이집 하원이 늦어질까 봐 뛰어가기 바쁘다.
전 직장에 입사할 때 '웹3 업계를 깊게 알아가자'는 꿈을 안고 있었다. 기자로서는 웹3 업계 종사자들과 친해지기에 제약이 있으니 같은 업계 종사자로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었다. 그러나 퇴사 이후 만난 누군가가 내게 "그 업체에 속했으니 웹3 업계 사람들도 많이 알겠네요? 누가 제일 괜찮은 사람이었어요?"라고 던진 질문에 바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만나온 사람들은 주로 근무 시간에 마주하는 회사 동료들이나 기자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웹3 업계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고 싶었기에 여러 밋업이나 부대행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웹3 업계의 또 다른 특징은 타산업 대비 해외 업체와 연락할 일이 많다는 점이다. 대체로 한국 시각보다는 미국 시각 위주로 업무가 진행되는 만큼 퇴근 후 저녁에도 스마트폰을 붙들고 있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전 직장의 한 파트너사는 다음날 오전에 보도자료로 배포해야 하는 영문 문서를 전날 오후 7시-그들에게는 한창 근무할 시간이었을-에야 전달해주기도 했다. 아이를 낳기 전, 심지어 만삭 때까지만 해도 그런 시간들을 견뎌낼 만했다. 하지만 워킹맘이 된 이후에는 야근이 버거워졌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내 아이는 주변 분위기에 예민한 편이었고 자신이 놀거나 밥을 먹고 있을 때 곁에서 엄마가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있으면 의기소침해하거나 짜증을 부렸다. 아이에게는 엄마와의 애착 관계 형성이 중요한 시기였기에 그 신호를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위의 문제는 아이가 좀 더 커서 말문이 트이면 놀이 도우미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해결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가장 큰 문제는 인력이 부족한 신산업의 특성상 육아휴직을 길게 쓰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업계 지인 중 한 명이 총 9개월(출산휴가 3개월+육아휴직 6개월)을 쉬었는데 웹3 업계에서는 일을 오래 쉰 편에 속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은 길게는 2년 3개월(출산휴가 3개월+육아휴직 2년)까지 휴직한 점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데도 말이다. 업계에서 떠도는 '어디의 누구는 한 달 만에 복직했다더라', '누구는 조리원에서도 일했다더라', '누구는 아이 낳고 3개월 만에 해외 이곳저곳 다니던데?' 등의 얘기가 내겐 큰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회사 동료 중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미팅에서 만난 기자 한 분이 이렇게 묻기도 했다. "어떤 분은 본인이 일하고 싶다고 아이 낳은 지 얼마 안 돼서 복직했다더라고요. 아이 재우고 새벽에 일하면 된다면서요." 그 말을 듣고 아이 엄마로서의 나 자신이 이 업계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이란 점을 깨달았다. 워커홀릭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업계에서 난 너무 워라밸을 중요시했나 보다.
결과적으로, 웹3 워킹맘으로서의 나는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었다. 아이와 살림을 온전히 남한테 맡기고 일에 매진할 수도, 그렇다고 일을 등한시하고 육아에만 집중할 수도 없었다. 일과 육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당찬 포부는 점차 사라지고 아무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너무 어린 나이에 어린이집에 맡겼다는 죄책감, 평일에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점에 대한 미안함을 떨치기 위해 주말에는 아무리 아파도 진통제를 먹고서라도 아이와 함께 어디로든 가야 했다. 그 악순환이 10개월 동안 이어지자 번아웃이 와버렸다. 워킹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도저히 메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