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위한 첫 방문에 이어 검사를 하고 검사 결과를 듣기까지 세 번의 병원 방문 동안 아이는 이상하게 들뜨곤 했다. 이번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영혼이 털린 채로 입으로만 대꾸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유독 종알종알 말이 많기도 참 많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면서 어처구니가 없다가 결국 마음속으로 화가 치밀고 말았다.
‘니가,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니가?’
아이의 상태에 대한 심각성보다 서운함이 더 크게 몰려왔다. 나는 유치할 대로 유치해졌다. 가족 그림에 남편을 안 그린 건 그렇다 치자. 남편은 워낙 아이와 함께 한 시간 자체가 적었으니까 어느 정도 합리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나를, 지 엄마를 안 그릴 수 있단 말인가? 하?! 뭐, 출자앙~? 녀석이 태어나고 나서 출장을 가느라 몇 날 집을 비운 건, 다섯 손가락 안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난 언제나 재택근무를 해야만 했다. 종종 친정 엄마가 봐주셨지만, 친정과 멀리 떨어지게 되면서 친정 엄마 찬스도 끝! 남편은 해외 출장을 다니느라 한 달 가까이 집을 비울 때도 많았고, 세 아이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돌도 지나지 않은 막둥이는 더욱 그랬다. 앞으로 안고 뒤로 업고 밥을 하고 글을 썼다. ‘3년 집중 육아’를 철석같이 믿었던 나는 그렇게 3년을 버티고 4살이 되어서야 아이를 기관에 보내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잘 보채서 오전 시간만 간신히 보내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그 마저도 반년 정도 다니다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제 조금 적응하나 싶었던 마지막 1년은 코로나 창궐로 인해 네 사람이 꼼짝없이 한 몸처럼 붙어 지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엄마를 안 그렸다고?
위에 두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이 아이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옆에서 자는 녀석을 보고만 있어도 좋아서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얼마나 쓰다듬었나 모른다. 부드럽게 감긴 눈의 긴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훑어보고, 오동통한 손을 쓸어보고 쥐어보고,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첫 아이 때는 내가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자다가 내 팔에 눌려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옆에서도 마음껏 이뻐해 보지도 못했다. 3살 1살, 두 아이를 키울 때는 이쁘다는 생각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삶이 전쟁 그 자체였다.
그러다 태어난 이 막둥이. 아! 이 아이는 존재 자체가 사랑이었다. 백일잔치도 돌잔치도 없이 모든 게 후루룩 지나갔지만, 그마저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 아이에겐 그 어떤 방식으로도 내 사랑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사랑을 알 거라고 믿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해도, 아무리 둔한 녀석이라고 해도, 모를 리가 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너는 왜? 도대체 왜? 엄마란 인간이 왜 이리 속이 좁아터졌는지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아이에 대한 서운함이 가시질 않았다. 가족 그림에 엄마를 그리지 않은 아이. 차마 어디 가서 말도 못 할 것 같았고, ‘금쪽같은 내 새끼’에 나올 법한 상황이라는 생각은 엄마로서 나의 자존심을 뭉개버리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