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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Sep 04. 2021

[나의 시그마 스토리] 그것만이 내 세상

17-70mm F2.8-4 DC MACRO OS HSM

언젠가는 꼭 써야겠다고 다짐한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너무 쓰고 싶으니까 오히려 쓰기가 어려웠다. 생각날 때마다 “써야지..”라고 중얼거린 것이 1년이 넘었다. 원빈도 ‘아저씨’에서 그랬다. 너무 아는 척하고 싶으면 모른 척하고 싶어 진다고.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생겼다. 시그마 창립 60주년을 맞아 '나의 시그마 스토리'를 공모한단다. 나는 원빈이 아니지만 바리캉으로 덥수룩한 머리를 깎고 결의를 다지던 그 '옆집 아저씨'의 마음으로, 망설임을 멈추고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SIGMA 17-70mm F2.8-4 DC MACRO OS HSM에 대한 기억이다.


17-70mm F2.8-4 DC OS MACRO HSM. 마지막 모습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항상 기억이 나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기억이 날 거라 생각되는 ‘추억의 장비’가 있기 마련이다. 이유는 가지가지다. 처음이라서, 오래 써서,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 만족도가 아주 높아서…. 조금 과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이런 이유는 어떨까. “그것만이 내 사진 세상의 전부였어서.”


사진을 처음 배울  대학교에서 보도사진의 관점으로 배웠다. 그러다 보니 사진을 찍는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떤 시선과 목적으로 찍는지,  의도가 저널리즘의 원칙과 가치에 위배되지 않는지 여부였다. 그에 따라 카메라와 렌즈라는 장비에 대해 받은 교육은  의도를 드러낼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능숙하게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고, 광학에 대해서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 이상은 궁금하지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정확히는  이상의 뭔가가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궁금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  맞겠다.


파리, 2015


그럼에도 시그마 17-70을 구매할 생각을 한 이유는 더 다양한 사진을 찍고 싶어서였다. 니콘 D80을 살 때 얻은 번들 줌 렌즈는 조리개가 어두워 해 질 녘만 돼도 촬영이 쉽지 않았고, 50mm 단렌즈는 밝았지만 표준 단렌즈여서 변주를 주기 어려웠다. 조건은 세 가지였다. 표준 범위의 줌 렌즈이고, 조리개가 밝으며, 가격이 합리적이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이 많이 쓰고 추천하는 모 브랜드의 제품이 있었다. 하지만 따라 하기와 주류 편승을 싫어하는 반골 기질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동했고, 세 달 간의 대학생 인턴 근무를 통해 모은 여윳돈은 아무에게도 추천받지 않았던 시그마 17-70을 구매하는 데 사용됐다.


17-70을 처음 들고 출사를 나간 날 나는 촬영한 사진들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저 줌이 되고 조리개가 밝은 렌즈를 원해서 산 것뿐인데 카메라가 업그레이드된 듯한 선명한 이미지가 안구를 강타했다. 옳은 선택이었는지 굳이 더 재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때가 2011년 초였는데, 이 렌즈를 무려 2019년 초까지 만 8년을 사용했다.


모허 절벽, 2017 / 호스, 2017


지금 생각하면 이 렌즈를 오랫동안 사용했던 것은 무지했기 때문인 것 같다. 2009년에 구매한 카메라 바디를 2018년까지 사용하는 동안 나는 사진을 종종 찍으면서도 새로운 카메라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었다. 카메라가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내 카메라가 시대의 표준에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도 알 턱이 없었다. 카메라 성능이 그대로니 처음부터 만족스러웠던 렌즈 성능이 갑자기 마음에 안들 이유도 없었다. 내 사진 취미는 말 그대로 내 세상 안에 갇혀있었다. 카메라는 원래 좀 무거운 것이고, 렌즈는 원래 이 정도 성능이면 굉장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17-70이 환산 화각으로 24-105나 마찬가지이니 여행지에서 주로 사진을 찍는 내 사용 패턴에 적격이었던 것도 숨은 이유였겠다.


뮌헨, 2015 / 암스테르담, 2015
런던, 2015 / 암스테르담, 2015


지금이야 많은 것을 알고 그 생각이 바뀌었지만, 무지는 의외로 행복을 낳았다. 그 렌즈를 들고나가 사진을 찍는 매 순간이 행복했고, 단 한 번도 2011년의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17-70이 내 손에 들어온 그때부터 나의 모든 특별한 순간에는 17-70이 함께했다.


사진은 참 감동적이고 교감을 일으키는 매체다. 이 렌즈로 사진을 찍으며 마주쳤던 순간들을 잊지 못한다. 묵직한 카메라는 여행자의 상징과도 같아서 친절한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밥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주문을 받는 중 이것저것 물어보며 마치 본인이 여행 온 듯 신이나 보였던 사람을 기억한다. 때론 누군가의 기록에 자신의 모습을 흔적으로 남기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곤 한다. 시장을 구경하는 나에게 시식용 고기 두 점을 내밀며 멋지게 포즈를 취하던 남자를 기억한다. 아빠와 공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린 아이, 비둘기떼 속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환한 미소도 기억한다.


베를린, 2015 / 리우 데 자네이루, 2013
호찌민, 2018


오모테산도의 한적한 골목, 타호 강의 짠내, 코파카바나 해변의 여유, 모허 절벽의 위용, 베를린 장벽의 먹먹함, 동코이 거리의 시끄러운 스쿠터 소리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두고두고 되새길 수 있는 사진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이다. 대학시절 함께한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나만큼 그들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던 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한 것은 내가 17-70을 만났던 덕분이다.


베를린, 2015 / 암스테르담, 2015
런던, 2015 / 파리, 2015


생각해보면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다. 대학시절 학회 MT에서 후배가 게임을 하다 지고 장난으로 베개를 걷어찼는데 그 밑에 깔려있던 내 카메라가 벽으로 날아간 적도 있다. 놀랍게도 필터만 깨졌을 뿐 렌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2018년 도쿄 여행을 갔을 때는 여행 이틀 차에 갑자기 줌 링이 고장 나 여분으로 가져간 50mm 렌즈로만 사진을 찍기도 했다. 거의 10년을 썼으니 누군가는 ‘이제 그만 쓰라는 뜻인가 보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 그 렌즈를 수리했다. 그냥 당연했다. 내 렌즈는 그거니까.


신형인 컨템포러리 17-70을 써볼 기회가 있었다. 같은 사양의 렌즈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작아지고 가벼워진 제품이었다. 내 17-70을 처음 썼을 때처럼 기분 좋은 충격을 기대했다. 하지만 며칠 사진을 찍어보았음에도 왜인지 아무런 감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내 17-70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저 내 17-70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커서 그랬나 보다 싶을 뿐이다.


2018, 도쿄
잔세 스칸스, 2015 / 런던, 2015
푸꾸옥, 2013


2020년 4월, 나는 17-70과 작별했다. 무지의 10년에서 벗어나 미러리스 풀프레임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자연스럽게 17-70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됐다. 추억이 어린 제품은 쓰레기나 마찬가지여도 끌어안고 사는 습성이 있으나 이 녀석은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단돈 5만 원에 어느 외국인에게 판매했다. 마침 그분의 카메라가 내가 쓰던 카메라와 같은 D80이라고 했다. 노장은 녹슬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닳아 없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중고 거래를 위한 글을 올릴 때 아무 물건이나 팔듯 대충 올릴 수는 없어서 두어 시간이나 붙잡고 매물 소개글을 썼다. 중고거래 글이 맞나 싶은 장황한 ‘썰’을 풀었다. 스스로 감탄했던 표현은 첫 두 문장이었다. [이 렌즈를 “좋은 렌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좋은 렌즈였다”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헌신해준 시간에 대해 내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뮌헨, 2015


<시그마가 2021년 9월 9일 창립 60주년이라고 한다. 지금 나는 과거와 달리 시그마의 광팬이 됐다. 카메라에 담긴 과학과 기술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배우게 된 것이 전적으로 시그마 덕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들의 철학을 사랑한다. 그들이 가진 사진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을 존경한다. 분야를 막론하고 이런 마인드의 회사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60년을 유지한 진심이 있기에 작아지는 사진 시장에서도 그들의 행보는 두드러지고 독자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 그 진심이 담긴 제품을 앞으로 계속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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