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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세연 Mar 08. 2023

다정한 슬럼프

다정한 슬럼프


"내가 뭐라고 슬럼프가 왔는지 모르겠어."
"그건 네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슬럼프가 올 수 없어."

그렇다. 그동안의 나는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달리고, 달리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첫 번째 횡단보도에 도착했었고, 초록불이 켜지길 기다렸었다. 이내 초록불이 켜져 또 달렸다. 가끔은 숨이 턱까지 차서 숨을 몰아쉴 때도 있었지만 이내 숨을 고르고 또 달렸다. 그렇게 두 번째 횡단보도를 만나 이번에도 초록불이 켜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켜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에게 슬럼프가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슬럼프란 제 실력을 발휘하던 사람이 잠시 주춤하는 일시적인 정체 시기란 말이다. 나와 슬럼프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내가 뭐라고. 내가 잘났던 적이 있었던가. 그러니 나에게 슬럼프가 온 것이 쉽게 이해가 될 리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기력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복잡한 생각만을 하고 또 했다.


덕분에 철학적인 인간이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살아야 하는 이유와 죽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무얼까. 내 삶을 주관하는 것은 나인데 과연 나는 이 삶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는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으니 글이 써질 리 만무했다. 덕분에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고 좋은 글은커녕 읽을만한 글도 나오지 않았다.

취미로 그리던 그림도,

종이에 끄적거리던 낙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건 네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슬럼프가 올 수 없어."


속에 답답함이 가득 차 있을 때, 친구가 해준 말은 나에게 소화제였다. 내가 잘하진 못했더라도 열심히는 했구나 싶었다. 그래서 슬럼프가 온 거였구나 싶었다. 잠시 쉬어도 된다는 증거구나 싶었다.


봄이 오고 있다. 모든 것이 깨어나려 하는 이때, 나는 누구보다 먼저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달릴 것이다. 달리다 넘어지면 까짓것 다시 일어나면 된다. 나에겐 튼튼한 두 다리와 여전히 뛰고 있는 뜨거운 심장과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강한 투지가 있기에 두렵지 않다.


슬럼프에 빠졌다는 건, 분명히 열심히 달려왔다는 증거다. 그러니 어깨 펴고 으쓱해져도 것 같다. 슬럼프는 어쩌면 열심히 달린 나에게 잠시 쉬어도 된다는 다정한 보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기죽지 말아야겠다.




글, 신세연.


인스타그램 @shin.writer

메일주소 shinseren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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