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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예 Jul 03. 2023

서른이지만 스물넷

당신도 5살은 어려질 수 있다

자자,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분도 모두 포함되는 얘기일 것이다.라는 점을 남기며 겸손한 척하면서, 자랑 아닌 척해 보려 하지만, 자랑처럼 느껴지는 얘기를 해보겠다. 하하. 



너 몇 살이야? 


나: 어... (왜 나이를 물어보고 그래, 얘네들은) 나? 맞혀봐! (일단 바로 말하기 싫으니까)

친구: 음, 스물넷? 스물셋? 

나: (뭐라는 거야, 진짜. 기분 좋게) 아니야~ 나 서른이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지만 입꼬리를 잔뜩 올리며 종종 대답한다. 솔직히 이십 대 후반이라고 해도 기분이 좋을 텐데. 여기선 늘 이십 대 후반도 아닌 중반, 이상한 친구들은 간혹 초반으로 말해주니 "나? 맞혀봐!"라는 말을 하는 것이 마냥 꺼려지는 일이 아니다. 



저요? 맞혀보세요.  


라는 헌팅 자리에서 가끔 말할 듯한 이 대사는 한국에서도 몇 번 해본 적이 있다. 여기서만큼은 늘 기분 좋은 정답을 듣진 못했다. 충분한 데이터가 쌓인 한국인들은 매우 객관적이었다. 정확하게 혹은 센스 있는 사람이라 기분 좋으라고 한두 살 어리게 말을 해주었으니. 


이십 대에는 사실 일이 년 차이로 어려진다 해도 같은 '2'로 시작하니 큰 임팩트가 없었다. 그러나 '3'으로 시작한 이후 '2'로 먼저 답해준다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나는 서른을 기다렸다!


서른이 되기 이틀 전, 당차면서 쿨한 다짐을 담아 적어 내려갔다. 사회가 만든 나이만큼은 어렸을 때부터 신경 쓰지 않았다고 자부하며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취업을 할 때나, 결혼을 생각할 때나. 누군가는 사회가 흡족해할 답안에 가까운 나이 별 퀘스트에 집중하고 때론 집착할 때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랬다고 생각했으니까. 


30대를 시작하는 '서른'이라는 한 해를 보낸 다음 해 1월 1일 이런 제목의 글을 썼다. 

"내 생각과는 다른 서른이었지만" 


불과 일 년 사이에 달라진 제목을 보며 어떤 마음으로 365일을 보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조금씩 다르게 느껴졌다. 오히려 어린 동료들, 학생들이 바라보는 30대의 시선을 간혹 들으며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고?' 때론 놀라기도, '나도 그랬나?'하며 되돌아 보기도 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가끔 "너도 늙어봐라."라는 말을 하는 것인지 어이없게도 실감을 하곤 했다. 


그리고 영화 속 대사인 줄만 알았던 "친구들이 하나씩 떠나가."라는 말이 현실이 되자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나도 얼른 시장에 뛰어들어 나를 데려갈 혹은 내가 데려갈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니야? 



뭐가 중요해? 우리 친구잖아.


나: 나 서른이야. 

친구: 헉 정말?

나: 근데 뭐가 중요해? 우리 친구잖아.


이런 대사들을 덧붙인다. 어학원에 다니는 중이라 일본인, 태국인, 기타 아시아인 친구들을 사귀게 되는데 가끔 나이를 묻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뭐가 중요해. 어차피 여기서는 우리 다 친구인데. 그렇게 스물넷이라면 스물넷, 서른이라면 서른. 어떤 나이 든 상관없이 살고 있다. 모두가 친구가 되어 살고 있다. 


한국에선 그렇게 살 순 없을까? 

 


한국이 좋아서, 호주로 왔다.


이 마음만큼은 변치 않는다. 30년 넘는 시간 동안 자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사람을 온전히 만든 한국이라는 나라가 좋다. 우리 가족이 사는 한국이 좋고 자랑스러운 내 고향이 좋다. 바쁘게 일하다 떠나는 다른 도시들이 좋다. 


한국에서 돈도 더 잘 벌고 더 넓은 곳에서 일을 하고 싶다. 그래서 영어를 택한 거고 여기로 와서 영어를 일 순위로 생각하며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호주가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나이를 잊고 사는 것. 나의 행동과 선택에 '나이'라는 택을 붙이고 살지 않아도 되는 것. 마치 한국에서 삶의 시계는 잠시 멈춤을 누르고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다 종종 생각한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과연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어떤 관문에 도달할 때마다 '너무 늦은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안 하고 당당하게 불도저처럼 살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렇게 꼭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늘 '늦었다.'라는 그 단어가 결정을 하는 일에 있어 고심을 하게 하는 꼬리표이기 때문이다. 



서른이지만 스물넷


어쩌겠어. 사실인데. 아무리 없어졌다 해도 다수가 나이 별 퀘스트를 쫓아 혹은 그 플랜에 맞게 사려고 노력하는데. 나 또한 서른인데 스물넷이라며 좋아하고 또 그 나이 별 과제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인데. 스물넷, 우리나라에선 사회로 나가기 시작하는 나이지. 그동안 하던 일과 다른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서 영어를 잘하기로 하고 이곳에 왔지. 


그래, 어차피 얼굴도 스물넷으로 보인다는데(물론 한국은 아니지만), 미쳤다 생각하고 나 스물넷이라 생각해 보자. 한국에 가도 새로 사회에 나간다 생각하고 살자.라며 정신 승리를 하며 한국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려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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