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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륫힌료르 Nov 19. 2019

흐르는 시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엄마와 함께 떠난 추억여행


추석연휴를 맞아 머문 고향에서 오랜만에 때 아닌 추억여행.

중학생 때부터 쓰던 내 휴대폰들


서랍 속에 오래도록 처박혀 있던,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온 10년 전 2G폰들이 갑자기 눈에 띄었다. 먼지 쌓인 휴대폰 속 사진들과 90바이트 꽉꽉 채워 친구들과 주고받은 문자들. 어느새 푹 빠져 구경하다 보니 '정말 나는 고등학생 때  원없이 설쳤구나' '뭐가 그렇게 가랑이 째지도록 재밌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베개 삼은 채 침 흘리며 자는 사진, 친구 놀린다고 노래를 직접 작사작곡해서 부르던 영상, 교실 책상 위에서 요가하는 사진... 나도 참 요란하게도 놀았다. 동시에 지금은 겁나게 철든 척하는 나 자신과 셀카 속 여신 같은 친구들의 모습이 겹쳐 떠올라 '빵' 터지고 말았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어머니께 "나 이러고 놀았었다"며 철딱서니 없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보여드렸다. 어머니는 "가시나! 공부 안하고 설치기만 했네?"라고 핀잔을 주시다가 "너 어릴 때 사진 보여줄까?"라며 갑자기 앨범을 한무더기 가져오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둘이서 거실에 퍼질러 앉아 앨범을 한 장씩 넘기며, 조금은 갑작스럽게 추억여행을 떠났다. 내가 보고싶어해서 꺼낸 앨범인데 어머니가 더 신나신 것이 함정. 사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아유~ 니가 이렇게 귀여울 때가 있었는데" "너 이거 기억 나? 엄마는 사진 보니까 너희들 어떻게 키웠는지가 생생하게 생각난다" "이렇게 깜찍하던 게 왜 이렇게 됐냐" 폭풍 리액션을 하셨다. 내게도 밥만 잘 먹어도, 잠만 잘 자도 칭찬 받던 시기가 있었다니. 새삼 신기하고 마음이 몽글몽글한 게 이상해졌다.




그런데 막상 앨범을 계속 넘기다보니 시선이 나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다름아닌 나를 안고 있는 내 어머니 아버지의 젊디 젊은 모습. 지금 내 나이보다도 어렸던 두 분의 풋풋한 청춘시절...


엄마. 우리 엄마가 언제 이렇게 예뻤지? 아빠. 우리 아빠 어쩜 이렇게 샤프했어?


배우 뺨치는 어머니의 미모와 머리숱 세상 풍성했던 아버지의 20,30대 사회초년생, 연애시절, 신혼 초기 모습을 보고있자니 누가 심장을 강아지풀로 살살 간지럽히는 것마냥 곧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엄마 아빠도 처음부터 내 엄마 아빠는 아니었네..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눈으로 확인하니까 왜 마음이 이상하지.


엄마 아빠에게도 누구보다 반짝이던 청춘시절이 있었구나. 저 철없이 해맑고 모든 게 서툴고 사랑 앞에 무너지던..



앨범의 어느 장부터인가, 풋풋한 청춘남녀의 모습은 내가 태어나고 동생이 태어나면서 부모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양팔에 나와 동생을 하나씩 끼고 다니는 슈퍼맨, 혹은 나란히 누워 책을 읽어주는 한없이 다정한 모습으로.

사진 속 나와 동생이 점점 인간의 형태를 띠게 될수록 어머니의 눈가는 처지고 아버지의 머리숱은 줄어들었다.


수록 앨범을 마저 보기 힘들었던 건,

당신들의 청춘을 앗아간 것만 같은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내게도 이렇게 멋진 청춘을 살아갈 기회를 주심에 고마워서였을까.



그리고 지금 여기, 어느덧 나는 그 시절 내 어머니 아버지처럼 난생 처음 겪어보는 세상만사에 이리저리 치이고 사랑에 설렌다.

동시에 젊음으로 충만했던 당신들은 명절 직후 고된 몸을 뉘기 바쁜 중년의 모습이 됐다.

어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나보다. 본인의 젊을 적 사진보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젊을 적 사진에 시선을 더 오래 두시는 걸 보면...

언젠가 내게도 어머니처럼 내 자식과 함께 지금 우리의 모습을 들춰보게 되는 날이 오겠지.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날이 빨리 오는 건 싫다.


흐르는 시간의 바짓가랑이를 꼬옥 붙잡고 놔주기 싫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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