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회사에서 다소 충격적이고 신선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렇게 말하면 큰일이라도 났나 싶겠지만 그런 건 아니고, 다만 3년차인 내가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장면이다.
그건 바로, 부서장님께서 탕비실 정수기 물통을 번쩍 들어올려 갈고 계신 모습.
희한하다.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이 왜 그리 신선했을까? 그 뒷모습을 보는데 내 안에서 정체 모를 울림이 느껴졌다. 물통을 들어올리는 중년의 왜소한 체구가,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인처럼 느껴졌다.
2년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네 분의 부서장님을 만났다. 대체로 무난한 분들이셨지만 갓 들어온 신입에게 '부서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그 분들은 범접할 수 없는 누군가였다. 모두가 부지런히 부서장님의 눈치를 살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 분들의 말 한 마디면 몇 주 동안 열심히 검토한 안건들도 손바닥 뒤집듯 엎어지기 일쑤였다.
신입 때 나는 부서장님이 좋아하시는 음료를 항상 냉장고에 채워둬야 했다. 보고 한 번 드릴라치면 결재판에 서류를 예쁘게 끼운 뒤, 이런저런 눈치를 보고나서야 결재를 받을 수 있었다. 나 같은 주임 나부랭이에게 부서장은 그렇게나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부서장님께서 직접 탕비실 물통을 갈고 계신 거다. 까마득한 후배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얼마 전 두 번째 부서로 옮기면서 지금의 부서장님을 만났다. 나의 네 번째 부서장님이다. 이전 부서에서 업무상 통화를 했을 때 처음 대화를 나눠봤다. 심한 전라도 사투리와 화난 듯한 목소리. 당시 신입이던 나는 주눅이 들었다. 그래, 솔직히 첫인상은 안 좋으셨다.
그러던 중 최근 팀간 업무조정으로 서무를 내가 맡게 됐다. 전통적으로 서무는 막내들이 하는 업무다. 내 밑으로 후배가 두 명이나 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서무를 뗀 지 이미 오래된 상태라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던 차에, 부서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OO씨. 서무 하고 있제잉?"
"예 그렇습니다."
"나도 막내 생활을 오래 해서 서무는 허벌나게 해봤네. 근데 내가 회사를 이만치 다녀보니까 작은 일을 잘해야 큰 일도 잘하겠더라고. 서무 하면 부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 수 있어. 우리 부서 살림을 자네가 하는 거다 생각하고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한 번 성장해봄세."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고 일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도 몰라주면 서러운 법이다. 섭섭해지려던 찰나 부서장님의 격려 한 마디는 꽤나 큰 힘이 됐다. '고생하는 거 내 다 안다, 사소해보이지만 지금 당신이 하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다'라는 메시지였다. 신기하게도 그 뒤로는 서무를 하면서도 그 일이 하찮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간만에 부서 간식을 먹던 날의 일이다. 오늘의 메뉴 햄버거가 도착했는데 당시 부서장님은 하루종일 회의 중이셨다. 우리는 부서장님 몫을 보관했다가 회의가 끝나고 전달드렸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
"나만 주는거야? 부서 직원들 다 먹었나? 안 먹었으면 직원들을 줘야지."
"저희는 다 먹었습니다."
"그래? 잘됐다. 이걸로 저녁 해결해부러야겠네."
짧은 대화였지만 소소한 것에서부터 직원들을 먼저 생각하시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그 외에도 우리 부서장님은 작은 일에도 "고생했네"라며 항상 직원들을 격려하신다. 메모장 하나 덜렁 들고 가도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해주신다. 휴일근무 때면 직원들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하신다. 물통 가는 모습처럼, 이토록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직원들을 얼마나 생각해주시는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나의 부서장님은 내가 여태 '부서장' 하면 떠올렸던 관료제 속 상사의 이미지를 깨주신 분이다.
좋은 리더란 어떤 사람일까? 수많은 리더십 이론을 공부했지만 회사생활하며 몸소 깨닫는 편이 더 효과적인 것 같다.
아랫사람의 고충을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작은 일에도 의미를 부여해주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세하게 챙겨주는,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앞장 서서 고생하는 사람.
사람은 첫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했던가? 두 달쯤 함께해보니 목소리는 원래 크신 거였다. 전라도 사투리도 자꾸 들으니 구수하다. 작은 체구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시는 탓에 직원들도 기운이 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