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열두 해 전이 된 2011년 2월의 어느 날, 대학교 새내기로서 네 친구를 처음 만났어. 네 친구와 나는 새터에서 같은 조였고 우린 급속도로 친해졌지. 갓 상경해 모든 게 낯설던 내게 같은 학교에 합격한, 그것도 첫날 같은 조로 묶인 수도권 출신 여자애는 뭐랄까? 어서와! 서울은 이래, 하고 안내해주는 이정표였고 나의 기댈 곳이었어. 나는 유쾌하고 털털한 성격을 지닌 내 친구가 좋았어. 그리고 너는, 그런 내 친구와 어릴 적부터 늘 함께하던 절친이야.
내가 너를 처음 알게 된 건 내 친구이자 너의 절친(아, 내 친구이기 이전에 너의 절친이라 말하는 게 더 맞겠다)인 A를 통해서야. 싸이월드, 페이스북,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이르는 십수 년 간의 SNS 역사 속에 나는 늘 A와 연결돼 있었고 그녀의 게시물 속에는 꽤 자주 네가 등장했어. 왜 있잖아. 누군가와 친해지면 그 사람의 절친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그와 직접 아는 사이인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거. 나 역시 그랬달까. 너는 나를 알까 싶었지만 나는 너를 스무 살때부터 서른둘을 앞두고 있는 지금까지 늘 알고 있었어. 너는 몇 년 전 A와 함께 영국 여행을 다녀왔고, 글이 좋아 출판사에 입사했고, 공사다망한 중에도 꾸준히 글을 써서 단편소설 '나주에 대하여'가 작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쾌거를 누렸어. 그리고 등단 후에도 부지런히 글을 모아 두어 달 전 첫 단편소설집을 출간했지. 이 모든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역시 A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였어.
그때부터였을까. 그저 친구의 친구였던, A의 SNS 속에나 존재하던 네가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은 게. 내 손가락은 어느새 네 소설집을 주문했고 내 눈은 네 문장을 토씨 하나 안 놓치려 덤벼들었고 내 입은 너의 뛰어난 필력에 와, 하고 있었어. 그리고 평온하던(혹은 지루하던) 내 가슴은 정말로 오랜만에 쿵쿵, 반응했어. 네 글에 흠뻑 빠져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가락은 A에게 "네 친구 정말 대단하다"며 카톡을 보내고 있더라. 무슨 이유에선지 그런 평이 너에게 닿길 바라면서. "내 친구가 네가 쓴 책 읽고 대단하다고 칭찬했어"ㅡ 뭐 그런 말로라도 너에게 내 존재를 알리고 싶었던 건지.
너는 '작가의 말'에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다보면 못생긴 마음들이 찌꺼기가 되어 남는다"고 했어. 그 못생긴 마음들을 글로 쓸 때 행복하다고도.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못생긴 마음'을 8편의 단편소설로 멋지게 풀어냈어. 너의 문장은 매우 섬세하고 어떤 면에선 날카로워서, 사회적 인간의 범주에 속한 사람이라면 속으로 삼키고 말 법한 마음들을 하나하나 건드렸어. 마치 데자뷰처럼 소설 속 주인공의 상황을 내가 겪어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지. 사실은 상황이 아니라 소설 속 인물들이 느꼈던 감정들을 나 역시 경험한 거였지만. 네가 동갑내기 작가여서 더 그랬을까, 소설 속 인물들이 그토록 나 같아서 더 흡입력 있었어.
좋은데 싫은 마음,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사실 요동치는 마음, 축하를 빙자한 질투... 뭐 그런 것들도 네가 말한 못생긴 마음들에 속한다면, 고백하건대 나 역시 너에게 그런 못생긴 감정들을 느꼈어. 아마도 그건 내 꿈이 너처럼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거여서. 유일한 버킷리스트가 언젠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는 일이어서. 그리고 네가 대단한 유명인이 아니라 그저 내 친구의 친구여서. 실제 너와 말 한 마디 나눈 적도 없고 A의 SNS 속에서나 어깨너머로 접했을 뿐이지만, 고작 그런 이유들로 내 못난 내면은 본 적도 없는 너를 깎아내리기 바빴어. 책을 주문한 것도 사실 '그래봤자 내 삶의 궤적과 크게 다르지 않을 31살 동갑내기가 잘 쓰면 얼마나 잘 썼겠어?' '그래도 어떻게 썼는지 궁금은 하네..' 그렇게 배배 꼬인 마음에서 비롯된 거였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처음엔 좀 약오르더라. 8편의 단편소설을 한 편씩 읽을 때마다 어, 이거 내가 쓰려고 했던 주제인데?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거든. "이건 언젠가 써야지! 난 정말 창의적인 인간이야!" 들떠서 글감들을 신나게 메모했는데, 네가 "내가 먼저 썼지롱!" 하는 느낌.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네가 나보다 몇 발짝이나 앞서있단 것이 뼈 아프게 와 닿았어. 먼저 꿈을 이룬 사람들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도. 나는 글감들을 메모해두는 데 그쳤고, 너는 내 메모장에 잠들어있는 글감들을 맛있게 요리해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냈으니까. '나주에 대하여' 속 주인공처럼 출판사 SNS에서 너의 모습을 훔쳐보고 폭풍검색으로 너의 발자취를 좇으면서 깨달았어. 내가 질투했던 건, 어느 날 운이 억세게 좋아 소설집 출간까지 후루룩 해치운 내 상상 속 너라는 걸. 실존하는 너는 늘 책을 가까이했고, 글이 좋아 출판사에 입사하기까지 했으며, 언제나 글의 곁에 맴돌면서 한 우물만 파는 1만 시간을 보냈다는 걸. 그것도 여러 번을. (그래서인지 '꿈과 요리'가 내겐 베스트 작품이야. 솔지가 나 같고 수언이 너 같고 그렇더라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너는 수언처럼 늘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 가까이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해왔을 테니까.)
그런데 있지, A에게 보냈던 카톡 ㅡ "네 친구 정말 대단하다" ㅡ 은 진심이었어. 비록 그 속엔 너를 대단하다 인정해버리면 못난 마음을 가졌던 나의 초라한 내면이 조금은 체면치레를 할까, 뭐 그런 생각도 한 스푼 있었지만. 그리고 책을 덮은 지금은 너에게 진짜로 고마워졌어. 내가 느낀 못난 마음들이 유별난 건 아니구나 안도할 수 있게 해줘서. 그 감정을 인정하고, 지금 이 글처럼 내가 감히 그랬었다고 고백하는 용기를 갖게 해줘서. 그리고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무엇보다도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줘서. 평범한 듯 보이는 네가 먼저 꿈을 이루는 걸 보면서, 동시에 특별할 것 없는 내 일상에도 글감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했어. 일하느라 글 쓸 시간이 없다는 허울 좋은 핑계 역시 출판사 일을 계속 하면서 작품활동을 하는 너로 인해 보기 좋게 찌그러졌고. 나는 이제 너의 발자취를 따라 책도 열심히 읽고 글도 꾸준히 쓸 거야. 그러니 너의 다음 한 발짝도 살풋 기대해볼게. 기회가 된다면 이토록 섬세한 감성을 지닌 너와 SNS 너머 친구의 친구가 아니라 자질구레한 수식어가 필요 없는 진짜 친구가 돼보고도 싶다. 열렬히 응원해. 김화진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