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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Jul 16. 2022

사랑, 언제까지나 사랑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책을 읽고 있다. 오늘은, '어노인팅'이라는 워십팀의 대표이자 예배인도자인 최요한 님의 에세이를 읽어보는 중. 어제 집에서 혼자 밥을 먹으면서였나, 유튜브를 열었는데 반가운 얼굴이 보여 클릭해보니 이분이 나와 계셨다. 일종의 기독교 토크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하나, 간증이라고만 하면 너무 무겁고 고백 혹은 나눔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주영훈 님이 진행하는 '새롭게 하소서'라는 CBS 프로그램입니다).


최요한 님이 등장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초입에 책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분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책으로 먼저 읽고 싶은 마음에 바로 그 자리에서 책을 주문했다. 영상으로 미리 들으면 어쩐지 '스포일링'이 될 것 같아 책을 먼저 읽고 나서 영상을 보고 싶었다.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도 너무 궁금했지만 책을 읽은 후로 미뤄보기로.


어노인팅 예배 영상이나 음악을 들으면서 이분의 인도가 참 좋다고 느꼈는데, 막상 이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늘 잔잔하고 평온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책을 읽으면서는 이분의 삶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좀처럼 내면의 파도가 일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그의 삶에도 굴곡이 있고, 여느 평범한 사람처럼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며 삶이라는 무게에 고뇌하기도 한다. 왠지 실수가 잦은 나는 요한 님의 이불킥 실수담에 같이 꺅 놀라기도, 웃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다. 와, 생각만 해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것 같은 그런 순간 말이다. 읽으면서 내가 일하다가 저지른 실수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정말 기막히고 황당한데 그래서 너무 많이 웃기도 했던 실수담이 하나 있는데 이건 다른 분과 엮인 일이라 나중에 허락을 받고 써야 할 것 같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ㅎㅎㅎㅎㅎㅎ 그저 헛웃음이 나온다. ㅋㅋㅋㅋㅋ라고 써봐도 감정을 담을 수가 없..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땀이 난달까. 허허.


아무튼, 책의 도입부가 많이 무거워서 내내 그런 톤일까 싶었는데 진중했다가 따뜻했다가, 때로 이렇게 웃겨주시기도 하면서 진솔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워십팀 '어노인팅'의 소소한 뒷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다. 어노인팅 사무실의 소란한데 정겨운 풍경, 자신있게 곡을 썼는데 튕겨나가는 에피소드, 여전히 앨범을 수작업으로 포장한다는 이야기... 마치 대학 때 몸담았던 동아리방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글을 읽는데 이런 부분이 나오더라. 이분도 자기의 '죄'의 문제 때문에 씨름하고 너무 힘든 과정 중에 있었다고. 그런데 누군가 자신에게 거기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보라 했다고. 정확히는 이런 구절이다.


깊게 교제하고 있는 목사님의 조언을 들었다. 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해 주셨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그것을 조목조목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빼앗길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죄를 두려워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랜 기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오직 헤어지지 않을 방법만을 연구한 것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려는 노력보다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최요한, 『기다림이 길이 될 때』, 126-128 부분


책을 읽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렇네, 나도 이러고 있었구나. 마치 혼나지 않으려는 아이와도 같이 '어떻게 하면 그분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땅에 그어진 선을 밟지 않고 건너려는 사람처럼. 며칠 전엔 어떤 교수님이 이런 얘기를 하시는 영상을 보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와서 쉬어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당시 '율법으로 인해 얽매이고 지친' 사람들을 은혜로 초대하는 이야기라고. 죄를 지으면 양이나 염소를 잡아 참회를 하고 제사를 지내야만 그 죄를 씻을 수 있었던 유대인들. 그들을 옭아맨 수백 가지의 계율들.


이미 구약의 시대를 넘어 신약으로 넘어왔는데도, 그러고도 2,000년이나 지났는데도 내 마음은 그 멀고 먼 과거에 묶여있던 거였는지도 모른다. 은혜의 자리로, 적극적인 사랑의 자리로 몸과 마음을 풍덩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실수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것에 연연했던 것인지도.


사랑하는 이와 누리는 적극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그의 눈치를 보며 '헤어지지 않기 위해' 애쓴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마음이고 생각인가.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사실 오로지 '감격'에 잠겨서 그 사랑 속에 늘 따뜻한 마음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시간이 가고 신앙의 연차는 늘어가는데 '왜 내 모습은 아직도 이렇게 부족할까'라는 생각 속에 그런 마음이 슬몃 싹텄던 것 같다. 그것이 차츰 자리를 넓혀가고, 기쁨보다 초조함에 자꾸 그 자리를 내어주었나보다. 원인을 알지 못한 채로 시간만 자꾸 흘러갔던 것.


그 사슬의 굴레를 끊어버리려고 우리를, 나를 아낌없는 은혜의 자리로 초대해주신 것인데. 그 사랑의 바다 속에서 나는 '온갖 규율이 잔뜩 적힌 낡은 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참 아이러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우리가 행위나 윤리를 내어버릴 수는 없으니까(바로 위에서 '이 낡은 책을 버려야겠다!'라고 쓰려다 그러지 못했다). 야고보서를 쓴 사도도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두려움이나 초조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겠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비슷해도 동기가 달라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역시 그 사랑에 가득 잠기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겠다. 사랑은 어린 아이일 때만 필요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오로지 '책임감'이나 '의무감'으로 걸어야 한다는 그 뻣뻣한 마음을 내려놓아야겠다. 나는 매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고, 그 사랑으로만 온전해지고, 그 사랑으로 채워져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겠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최요한 님은 말한다. 어린시절 부모님과 떨어져 외조부모님 댁에서 지내다 오랜만에 다시 부모님과 해후하게 되었을 때 느꼈던 감정에 대하여. '믿음 소망 사랑'을 우리가 갖고 살아가지만, 언젠가 우리가 다시 그분을 만나게 될 때는 오로지 '사랑'만이 남을 거라고. 이전에도 어디선가 비슷한 메시지를 들었던 것 같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져 믿음도 소망도 필요없게 될 거라고. 우리에겐 두려움 없는,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온전한 사랑만이 남아 충만해질 거라고.


그래, 그 순간을 생각하면 황홀해지지만,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믿음과 소망이 필요하다. 그 사이 때로 좌절감과 분노를 느끼기도 하면서. 이렇게 어리석은 초조함에 휩쓸리기도 하면서. 그러나 언제나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면서.


믿음, 소망, 사랑.

그러나 언제나 사랑.

그리고 사랑.

언제까지나 사랑.


그 사랑에, 가득 잠기는 날들이 되기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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