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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Jul 25. 2022

너를 사랑해,

백만번이라도 말해줄게


얼마 전에 받아 읽고 있는 책.

(사실 여러 분야의 책을 두루 읽고 있는데 어쩌다보니 연이어 기독교 서적들을 읽을 때 주로 글을 쓰게 된다. 아침엔 아무래도 묵상+공부의 목적으로 책을 읽게 되어 그런지 몰라도)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김진혁 교수님의 『질문하는 신학』이라는 책이다. 이분의 신간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를 인스타에서 홍보하는 것을 보고 궁금해서 찾아보다가, 먼저 나온 이 책이 더 궁금해져서 보게 되었다. 기독교를 둘러싼 질문들에 답하는 책인가보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사고 보니 '조직신학'을 좀더 실제적으로,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고자 애쓴 책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더 본격적인 신학 서적이었다는 것.


두께가 두꺼울 뿐만 아니라 종잇장이 몹시(!) 얇은데다 글자도 엄청 많아서 슥슥 페이지가 넘어가는 쾌감이 덜해 진도가 잘 나가지는 않지만, 어쩐지 그래서인지 더 붙들고 있게 되기도 한다(그래, 내가 좀더 읽어보겠숴! 하고. 이제 78페이지까지 읽었다 허허).



김진혁, 『질문하는 신학』, 20쪽
김진혁, 『질문하는 신학』, 24쪽

책의 목차 외에도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본문에 좀더 자세한 해제가 들어있다. 이런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고, 실은 조직신학이란 이런 작업을 하는 학문이라는 걸 보여준다(사실 조직신학 책이 한 권 있는데 여전히 앞부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이에게 주어야 하나도 싶지만 읽지 않겠지... 중고숍으로 보내야 하나ㅠ.ㅠ 아니, 다시 읽어볼까..?).


책에 대한 설명은 이쯤 하고, 아침에 아래와 같은 부분을 읽다가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김진혁, 『질문하는 신학』, 75쪽

개화기 즈음 성경을 번역하다 생긴 해프닝이다. 읽다가 정말 소리내어 웃었음.


하느님의 양색기셰샹의죄진쟈를보라(요 1:29).


응? 무슨 말이지, 했다가 뜯어보면 큭큭거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양색기/세상의/죄진/자를/보라.. 하느님의.. 양색기... 하느님의 양새끼.. 양새끼... 양새끼... 양새끼...!! (아니 어쩜 이리 입에 착착 붙는가, 아아, 죄송해요 예수님)


하나님의 어린양이 하나님의 양새끼가 되었다는 얘기다. 하핫, 아마도 이런 풍경이었겠지.


-선교사 : lamb of God.. 죠선에서는,, 모라고,, 하나요..? 그러니까.. 저기 저.. 애기.. 양..

-농부 : 아 저거? 저거 새끼구만, 양새끼! 저거 양새끼여!

-선교사 : 아하! 양색기..! 양색기, 오케이, 양색기.. '하느님의..양색기..를..보라..'

-농부 : 근디 그런 말이 이 경전에도 시방 써있단 말이여? 참말 기맥힌 책이구만?


김진혁 교수님의 본문을 좀더 읽어보면,


그런데 '하나님의 어린양'이 졸지에 '양새끼'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이처럼 민중의 언어로까지 번역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은근 유머 감각이 있으신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은근한 유머 감각이 있으신 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우리집에 있는 고양이들을 볼 때 특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고양이를 관찰하고 있으면, 웃음이 쿡쿡 나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라(세상의 모든 집사님들은 아실 듯). 저런 동물을 지으신 분이 어찌 유머 감각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싶어지는 것. 실은 그런 동물을 보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더 오묘한 것이겠지. 사람이 바로 그런 유머의 창출자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생각지 못한 엉뚱함에 웃을 일은 또 얼마나 많이 생기던가(세상의 모든 엄마아빠들 아시지요?).


책을 읽다 발견하는 이런 순간들로 인해, 역시 나는 책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읽고, 배우고, 웃고, 묵상에 잠겨 보는 이런 순간들 때문에.




어제는 주일 설교를 듣다 또 두근거렸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지만,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놀랍고, 감격스럽고, 따뜻한 마음이 된다. 마치 내 마음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씀하시듯, 내 마음을 좌락 펼쳐놓고 스캔하여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잖니, 하고 속삭여주시듯 메시지가 전개되었다. 물론 남들에게는 매주 이어지는 또 하나의 메시지이고,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아,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이구나.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구나.


얼마 전에 썼던 글처럼, 요새 나는 아슬아슬한 신앙생활을 하는 기분이었다. 성경을 읽으면 자꾸 내게 어떤 경고를 하는 것 같고, 내가 뭔가 잘못하면 질책당하고 혼날 것 같은, 그런 기분. 아침 큐티 본문도 하필 사무엘서인데, 선택받은 사람이었던 사울이 젊었을 때에 건전한 신앙을 갖고 있다가 차츰 믿음이 변질되어 가고,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는 스토리를 읽으며 더 그랬던 것 같다. 뭔가 마음을 옥죄는 듯한 느낌. 이것봐, 너도 잘못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본문 옆에 있는 가이드글도 자꾸 뭔가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메시지에서 바로 이런 것이 '율법주의 신앙'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아슬아슬 '외줄타기 하듯이', 까딱 실수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고.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나 감시하고 있다가 회초리를 드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예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겼고, 수많은 규율을 만들어 두고 사람들을 그 안에 가두려 했었는데, 실은 하나님을 잘 안다는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그런 시대에 예수는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 불렀고, 그 하나님은 사람을 품어주시는 분이며, 그래서 그분 앞에서 쉴 수 있는 것이라고.


너의 아픔을 내가 다 알고 있단다


마치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느낌이었다.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아. 아이고, 내 앞에서 실수하지 않고 빈틈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나에게 혼나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처럼 뭐가 그렇게 초조했어. 그 분주함을 다 내려놔도 돼. 그냥 내게 와서 쉬렴. 너의 머리털 하나하나, 너의 심장의 세포 하나하나 내가 다 알 정도로 너를 사랑하는데. 너의 고민과 아픔까지 모두 알고 있는데. 네가 울 때 나도 운단다. 누구도 너를 공격하거나 정죄할 수 없단다. 나와 함께 하는 길은 고행길이 아니야. 저 너른 언덕을 함께 걸어가는 산책길 같은 거란다. 그러니 그 짐을 내게 주렴. 내가 이미 대신 졌잖니. 너를 사랑해서, 너를 살리려고, 저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너를 살게 하려고 내가 그 모든 짐을 졌다는 걸.. 꼭 알아주렴.


설교 말미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종교의 짐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면 스스로의 상태를 잘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구나. 마치 숙제하듯이, 성경의 가르침을 지켜내지 못하면 탈락할 것 같은 기분으로, 인격의 성숙과 열매를 맺지 못해 회초리를 맞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었구나.


한편으로는 이 또한 신앙의 여정 중 일부라는 생각도 든다. 책 <천로역정>의 크리스천도 자기의 짐을 완전히 벗어버리기까지는 계속 지고 가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픈 열망, 그런데 잘 되지 않을 때 느끼는 좌절과 슬픔, 그로 인해 그분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자책감, 다시 또 노력, 그런데 잘 안되는 그 반복의 고리 속에 갇혀 어디가 출구인지 모르고 헤매는 마음. 그런데 다시금, 그분이 "똑똑," 하고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그 고리 안에 손을 뻗어 나를 꺼내놓으시는 것.


어째서 자꾸 그분을 오해하게 되는 것일까. 사랑이 많고 따뜻한 아버지가 아닌, 내가 잘못하면 무섭게 혼내는 그런 아버지로. 구약의 이미지 때문일까? 그분이 공의의 하나님임을 알아서일까? 그것이 치우친 신학으로 이끈 것일까? 아니면 실제 인간적인 아버지의 이미지 때문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최근 좀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며 수많은 기도를 드렸다. 무엇보다,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사랑의 말을 들려주고 또 들려달라고. 수백 번 수천 번이고 말해달라고. (이런 걸 보면 아들이 나를 참 닮았다. 내 목소리가 조금만 달라져도 엄마가 자기를 혼내나, 싫어하나 오해하고, 하루에 100번씩 사랑한다고 말해달라는 아들. ENFP 엄마에게서 나온, 아마도 ENFP로 짐작되는 나의 아들 강아지)


그런 내게 들려주신다. 얘야, 너를 위해 내가 '양새끼'가 되었단다. 거봐, 웃을 수 있지? 너를 위해 내가 직접 '양새끼'가 될 정도로 널 사랑해. 사랑하고 또 사랑해. 앞으로도 너는 많이 실수하겠지만, 그 모든 걸 뛰어넘을 만큼 널 사랑해. 넌 나중에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게 되면 깜-짝 놀랄 거야. 너를 위해 무엇을 계획하고, 어떻게 너를 인도했으며,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알게 되면 말이야. 그런데 말이지, 지금 좀더 알아도 좋을 것 같네. 내가 너를, 얼마나, 이렇게, 애틋하게 사랑하는지.


주님은 주님의 종들의 목숨을 건져 주시니,
그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_시편 34편 22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_마태복음 12장 7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_마태복음 11장 28-30절



어제 설교 후 이어진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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