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고르게 비추이기를 기도하며
오후가 지나간다. 거실로 들어오는 햇살이 아름답고 따사롭다. 아이 하원을 위해 집을 나서며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고 눈부신 세상을 주셨나요!' 경탄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너무 많이 망가뜨려 버렸어요. 자연을 훼손하고, 전쟁을 벌이고, 서로 미워하면서.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기를 기도해요.'
문득 이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죄스러워질 때가 있다. 물난리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 가난으로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소식을 듣고 나는 마음으로 많이 울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먹먹함과, 이들이 겪었던,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파 울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하다 복지관이나 봉사활동 같은 것들을 검색해 보았다. 아이들 키우는 엄마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았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드물었다. 아가를 좋아하니 아기를 돌볼 수 있는 곳은 없을까 찾았지만(아기 돌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새 잊은 것인지!) 그 또한 충동적으로가 아닌, 교육과 헌신을 통해 오래 봉사해야 하는 일이었다. 물론 일회성 봉사도 있었지만 주로 20대 청년들이 봉사활동 겸 친목 겸 하는 그런 이벤트였다.
꾸준하지 않은, 어쩌다 한 번 마음 내키는 대로 찾아가는 것은 관련업에 종사하는 분들께 오히려 폐를 끼치는 일이겠다 싶었다. 남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이 역시 쉽지 않은 일임을 절감했다. 매주 주말 시간을 내어 내 몸과 마음을 드리는 일을 나는 할 수 있을까?
컴패션이나 기아대책기구 같은 NGO를 통해 기부하는 일은 꾸준히 해오고 있지만, 좋은 것들을 우리만 누리는 것을 넘어서 다른 이를 지속적으로 섬기는 일은 또다른 차원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을 우리만 누리지 않고, 다른 이에게로 더 흘러가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삶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가르칠 수 있을까.
가장 작은 이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귓전을 울린다. 이 아름다운 햇살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공간과 시간은 그렇지 않다. 지금 읽고 있는 로완 윌리엄스의 책 『삶을 선택하라』에서는,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설교가 들어있다.
예수에게 찾아와 묻는 부자 청년을 보고, 예수는 '그를 사랑하여' 답해 주었다. 너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러나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다.
송인수 선생님은 그분의 책 『만남』에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셨다. 어쩌면 그 부자 청년은 아리마대 요셉이 아닐까 하고. 처음 그는 근심하며 돌아갔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몸을 거두고 그를 위해 무덤을 마련한 그 요셉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로마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어쩌면 목숨을 내어놓고 그 일을 감당한 요셉. 제자들마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떠나갔을 때 묵묵히 그를 위해 장사지낸 요셉.
내게도 때가 있겠지. 좀더 나눌 수 있는, 나를 내어줄 수 있는 때가 오겠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들이 있지만, 나를 사랑하는 분과 떠나는 믿음의 항해에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오겠지.
그 믿음의 파도에서 서핑하는 법을, 오늘도 나는 조금씩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