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햇살을 잊지 않기 위하여
오랜만에 홀로 외출을 했다. 비가 오는 날씨와 해가 드는 날씨의 격차가 크게 느껴지는 날. 날씨 때문은 아니고, 미리 잡힌 일정이 있어 다녀왔다. 오는 길 버릇처럼 인근 책방에 들렀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낯설고도 반가운 책들이 고요히 자리를 잡고 있다. 평소라면 잘 고르지 않을 책도 한 권 골랐다.
햇살은 아직 뜨겁다. 다행이라 여긴다. 이 여름과 가을이 다 가버리고 나면 얼마나 슬플까 생각한다. 그렇다, 그 정서는 슬픔과 닮아 있다. 반복되어 돌아오는 겨울이지만, 그 겨울이 갈수록 힘에 겹다. 어둡고 차가운 계절이 싫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데 내겐 밤이 긴 그 기간이 너무 버겁다.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을 만큼. 샌프란시스코 같은 곳에 가서 살면, 좀 나을까. 그러나 모국어가 빼곡한 책들이 있는 이곳을 버리고 내가 어디를 갈까.
봄이면 목련이 피고 벚나무에 분홍 꽃이 움튼다. 그런데 그게 반가운 느낌과는 다르다. 뭐랄까, 이제야, 이제서야, 그리고 무심하게도 봄이 왔구나 싶은 것. 이걸 보려고, 내가 그 기나긴 겨울을 이렇게 힘들게 나고 있는 걸까 싶은 것. 그 긴 겨울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이제야 너를 만났구나 싶은 것. 약간은 원망 섞인 마음 같은 것. 그런데 여전히 날씨는 쌀쌀하고 추워서, 언제 따뜻해질지 꽃샘추위는 언제 물러날지 알 수 없어지는 그런 시기의 그 지리함을 다시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해서. 연둣빛 새잎이 울울창창 돋아나기 전까지는, 봄도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11월 즈음에야 스멀스멀 찾아오던 겨울의 우울이 이 초록이 다 지기도 전에 이렇게 찾아온다. 지난 주말에 만난 가을의 쨍한 햇살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편으로 나는 슬펐나보다. 언제 또 너를 볼까 싶어서. 너도 곧 가버리겠지, 싶어져서. 나를 두고 가겠구나, 싶어서.
일 년의 주기가 이제는 너무 짧게 느껴진다. 새해가 시작되었나 하면 어느새 5월, 8월, 10월, 성큼성큼 넘어가는 느낌. 11월에 미리 듣는 캐롤에 설렜었는데, 이제 언제 들어도 그다지 감흥이 없는 것처럼. 시간이 나를, 슬몃 웃으며 스쳐 지나간다. 안녕, 나는 지나간다, 하고.
그래도 이 계절이 다 가기까지는, 주말마다 애써 외출하고 이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하루를 보내기로 한다. 가을햇볕엔 며느리를 내놓는다지만, 마음껏 저 빛나는 햇살에 몸을 내어주기로 한다. 만나기도 전에 이별하지 않게, 진하게 만나고 또 슬퍼할 수 있도록. 겨우내 그 추억으로 다시 그리워할 수 있도록.
너무 아름다워서 쓸쓸한 가을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