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퀴즈 온더 블럭 중에서, 어린이의 얼굴은 일부러 잘랐다. 자막에 공감하면서 얼굴까지 짤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정말 공부 끝이 없잖아요. 공부 너무 싫잖아요. 근데 해야 한다는 게 고달프죠. 하기 싫어서 우는 어린이도 있어요. 글쓰기 너무 하기 싫죠. 이슬아 작가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어디에서 한 말일까. 라디오부터 강의 영상도 꾸준히 챙겨보며 그때는 메모하지 않았음이 이때 약간 후회된다. 이 말이 다른 말보다 계속 생각나고 또 생각나고 자다가도 꿈에 나올 줄 몰랐지. 당연해서 당연한 줄 몰랐고 당연해서 정확히 메모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안 했던 것이다. 이럴 땐 가장 중요한 삶의 괴로움 포인트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해서 나 또 섬세하지 않은 인간이고... 이래서 섬세한 작가, 다른 시각으로 보는 작가 되고 싶다는 말을 주야장천 한 것이 부끄럽고. 그는 우리가 부지런하면 좋지만 부지런해서 괴롭다는 것도 안다. 게을러서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가 공감대를 툭 하고 건드리는 것이 문학으로 대하지 않는 무례한 질문의 시작일까 라는 생각도 든다. 즉각적인 공감이 이끌어내는 것은 동시에 사유라는 깊은 생각의 미로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으로 간주되어 '문학'을 권위의 이름으로 삼은 이들에게는 그가 하는 일이 유행으로 보인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가끔 웹소설도 문학의 장르로 둘 수 있느냐, 라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눠보다가 웹소설 쓴 사람들이 해내는 글쓰기의 꾸준함 같은 것과 콘셉트를 잡다가 엉망진창 되는 나의 단편 소설들을 보면 이야, 대단한 사람들이야 정말이라고 중얼거리며 이야기를 마치는 것이다. 세상에 숙제는 많고 해야 할 공부는 끝이 없어 참 고달프다. 그 고달픈 것을 계속 붙잡고 하거나 끝까지 해내도록 하는 힘은 하는 일에 대한 확신과 수 없이 흔들릴 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를 되새기며 다잡는 순간들이 모여 만든다. 혼자로는 안될 때가 많다. 내 안의 힘은 분명 다른 이들의 좋은 점을 관찰하고 기억하여 담았기 때문이고 그 좋은 점을 고달플 때에도 현시하는 이들이 준 선물이다. 이것이 문학의 한 결이라고 믿는다. 문학은 고통 중에 직면과 허무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담론으로 쌓여 많은 결을 가지고 있다. 문예과를 나오지 않았지만 내가 읽는 책과 콘텐츠와 바라보는 배우와 시인과 영화감독이 보여줌으로써 알았다.
일상에도 문학은 있다. 즉각적인 공감에도 문학과 같은 결이 있다. 만일 지금 하는 공부가 고달픈 이유는 문학의 어떤 결을 직접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인생이라는 거창한 이야기를 다 살지도 않아 놓고 한다는 것이 귀엽고 우스울 수 있겠지만, 나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어린이도 어린이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자마자 나의 현재도 인생, 즉 생(生)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나이에 이르러서야 인생아, 인생아 라고 곡진하게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지금도 인생아, 인생아 라고 자조적인 부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야 어린이를 귀엽게만 보지 않고 그 고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섣부른 선민의식에 어린이를 선도하려는 태도를 없앨 것이다. 그 보다 더 재밌고 꼭 하고 싶은 공부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고달파도 계속 공부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