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만개하는 순간을 본 적 없다. 반려 식물도 없다. 내가 보는 것은 산책할 때마다 다른 형태를 보이는 꽃과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다. 영화 <리틀 조>에는 피안화를 닮은 붉은 꽃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석산화라고 불리는 이 꽃은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 여럿 별명을 가지고 있다.
파리지옥은 파리를 먹기 위해, 미모사는 팽압 현상으로 건드리면 오므린다. 움츠리는 수 많은 존재들 가운데 곁에 서는 순간 사각거리며 만개하는 꽃이 있다. 바로 영화 속 '리틀 조'다. <리틀 조>는 영화 내에서 존재하는 미스테리적 침묵에 음악으로 긴장을 유발한다. 여백을 두고 강한 드럼, 개와 원숭이가 우는 소리 등을 넣으며 영화 내에서 미묘한 긴장이 일으키는 서스펜스를 관객에게 음향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꽃 '리틀 조'는 파리 지옥이나 미모사처럼 오므리지 않는다. 마치 무수한 속삭임이 동시다발적으로 발화되는 것처럼 사각거리며 피어난다. 조금씩, 천천히. 무의식을 점령해가는 그것같이.
암살과 같은 침범이고 이러한 침범은 주로 외계 생명체, 불청객 등을 통해 표상한다. 이 꽃의 치명적인 점은 인간이 발명하고 배양하여 내부에서부터 '태어나게 한' 내부 존재라는 것이다. 외부에서 옴으로서 낯선 존재라는 것에 대한 경계로 서사의 긴장을 끌고 가는 것이 일반적 서사라면, <리틀 조>속 '리틀 조'의 첫 등장은 배양 식물에 불과하여 별 위협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탄생시킨 이(발명자)가 자식으로 비유되는 꽃을 집으로 몰래 가져오는 일도 일어난다. 모두 자의로 일어난 일이다. 오이디푸스 비극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고독의 매뉴얼>은 이를 두고 '소외된 위반'이라 부른다. 근친상간이라는 불쾌한 골짜기를 인지하지 못한 채 위법 행위를 저지르고, 끝내 신탁대로 행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의 눈을 찌르는 비극이 주체로부터 '소외된' 채로 행해지는 '위반'의 결과라는 것이다. 보통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이컬어지는 이 서사는 남자 주인공인 경우가 많은데, <리틀 조> 속의 주인공은 여성이며, 이혼모이다. 오이디푸스와 같은 '소외된 위반'을 초기에 행하지만 그는 점차 이상한 점을 깨닫게 된다. 한 인물이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한 인물 속에서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안티고네의 비극이 동존하는 것이다. 안티고네의 비극은 이른바 '주체적 위반'이다. 자신이 부를 파멸을 알고 끊임없이 위반하는 것. 규칙을 위반하고 탈피하고자 하는 것. 주인공은 꽃 '리틀 조'가 점령해가며 만들어가는 세계를 의심하고, 위반하며, 파괴하고자 한다.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느낄 수 없는 감각이 있으며 나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시각 장애와 청각 장애를 가진 분들, 그리고 육체적으로 움직이기 힘든 분들에 비해 나는 청각으로, 시각으로, 심지어 4d라는 촉각적인 영역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후각은, 냄새는 아직 느낄 수 없는 부분이다. 미각도 그러하다. 그리고 <리틀 조>에서 주로 행해지는 미스터리의 영역이 '동양 음식'이라는 것과 석산화와 비슷한 꽃의 '향기'라는데에는 우리가 각기 다르게 상상할 수 밖에 없다. 동양 음식이라고 꼬집어 말한 것은 그들이 인종 차별과 같은 이야기를 하려했다기 보다는 영화가 모호한 지점에 있는 것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서양권에 있는 동양 음식, 동양권에 있는 퓨전 음식, 거기에 '일정한 맛'이 있는가. 오로지 그들 안에서 형성된 공동체의 증거인 것이다. 마치 아들 조가 꽃에 감염되자마자 엄마와의 배달 음식을 거부하고, 직접 낚은 고기를 구워먹으며 분리적 활동을 시작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다시 동양 배달 음식이라는 그들만의 음식, 즉 맛이라는 미각으로 돌아온 것처럼. 아들 조는 말한다. 맛있다고.
이 맛과 향의 영역에서는 영화와 관객이 분리되어 낯선 감각을 일으킬 수 있는 영역이다. 향을 매혹의 도구로써 사용해 인간 속으로 침투한다는 메타포를 관객에게 '미스테리 요소'로 작동시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아들과 아들의 친구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이 침투는 마치 죽음처럼 무슨 일이 일어난 지 모른다. 별 반 다를 바 없어보이고,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산뜻하게 말하는 그들의 표정은 우리에게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 공백, 그 미스테리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때론 스릴이라는 흥분제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리틀 조>는 다른 방면으로 두려움을 표현한다. 허무와 텅 빈 공황적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무감하게 말함으로써 향이라는 수수께끼가 가지는 공포를 날카롭게 벼린다. 그 향과 맛을 우리는 영영 모를 것이다.
-선택, 주체적 굴복과 소외적 지배 사이에서 영화 <기생충>에서 도드라지게 보였던 '선'을 활용한 분리는 여기서도 나온다. 집 내의 코너, 벽과 벽을 잇는 선에 주인공은 바짝 붙거나 긴장을 유지한 채로 넘어서길 주저한다. 그 앞에는 자신이 알게 되면 고통스러워질 속삭임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주체적인 위반을 시작하였으나 동시에 소외된 위반 행하는 데 걸쳐져있으므로 더이상 방관자의 위치를 고수하거나 '소외된 위반'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는 선을 넘는다. 끊임 없이 꽃이 만들어가는 법을 위반하기 위해 움직인다. 아들에 대한 사랑, 다른 이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사명감, 두려움 앞에서 그는 도망치지 않는다. 행동의 결과는 폭력이다. 끝내 폭력으로 인해 기절하게 되며 꽃가루에 노출된다.
<리틀 조>의 연출 중에서 의문이 드는 점은, 샴페인을 터트리던 장면에 있다. 이 장면을 해석한다고 해서 꽃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비극적 결과는 바꾸진 못한다. 다만 그가 오이디푸스와 같은 '소외된 위반'을 택하다 비극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꽃의 지배하에 들어갔는지, 혹은 안티고네가 위반을 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죽음을 알고서도 행했던 '주체적 위반'에 해당함으로써 꽃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하기로 결정한 것인지, 관점이 달라진다. 샴페인을 따는 다른 연구원들과 주인공 사이에는 고립적 선이 존재한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앞으로 할 행동은 타의인가, 자의인가.
나는 자의라고 해석하고 싶다. 영화 초반은 꽃이 안전하다 생각하여 연구소의 룰을 위반하고 꽃을 집으로 들고오지만(소외적 위반) 영화 끝이 다가올 수록 사람이 죽고, 자신이 폭력에 노출되기도 한 것이다. 아들은 더이상 그가 알던 아들이 아니다. 꽃을 없애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자신이 폭력에 노출되었다. 자신의 심리 상담사는 꽃에 대한 자신의 불안을 해석할 뿐 공감하거나 함께 돌파하려하지 않는다. '리틀 조'는 꽃박람회 후보에 올랐고 해외 수출도 되어 거대한 권력이 될 것이다. 그 앞에 무기력한 개인임을 깨닫고 숨죽인채 꽃의 지배로 들어갈 것인가, 죽은 사람처럼 좋은 말로 포장되어 잊혀질 것인가. 그는 선택해야 한다.
자의로 그가 꽃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샴페인 장면은 선택의 장면이 된다. 이른 바 주체적 위반이 아닌 주체적 굴복이다. 타의였다면 소외된 위반이 아닌 주체가 소거되어 꽃을 돌보는 지배 체계로 들어가는 소외적 지배가 된다. 빈곤 앞에 소년 소녀 가장이 얼마나 착취적 입장에 놓이는지 상상해보면 될 것이다.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지배하는 듯 하나 절대 진정한 권력 혹은 리더가 될 수 없다.
<리틀 조>의 연출 중 가장 도드라지는 연출은 대화를 나누는 배우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카메라는 옆에서 지켜봄으로써 배우의 옆 면을 정지된 채로 지켜보는 숏이다. 카메라가 고정된 채로 이어지는 원테이크 숏은 카메라가 트레킹 인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더 깊은 대화의 단절, 멀어지는 심리감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이는 기본 대화 장면을 그림자 연극처럼 공간의 깊이를 제거함으로써 그림자들의 몸짓과 표정과 대화에 집중하게 하고, 조용히 공포가 스미는 것을 표현하고자 이 영화는 고요히 움직인다. 가시적인 선도 분명히 있으며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 기류적 선은 선연하지 않음에도 서로의 공간에 들어서지 않음으로써 거리감을 보인다.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꽃이 만든 새로운 룰, 그 세계로 들어가길 선택하며 주체적인 비극, '주체적 죽음'을 맞이한다. 어느 지배로 들어갔든 그는 자신의 위반과 굴복을 알고 있다. 권력 앞에 무기력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꽃을 1순위로 두는 세계로 들어가 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진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체적이다.
샴페인 장면에서 주인공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관객에게 마음껏 상상하라고 펼쳐놓은 하얀 도화지 같은 것이다. 이후 상대에게 키스하는 주인공의 얼굴은 pretend(가장한) face인가, 주체성을 잃은 infected (감염된) face인가. 어떻게 꽃가루에 그가 감염되지 않았는지 또한 공백으로 남길 수 있는 영역이다. 그가 감염되어 수동적 존재로써 꽃의 세계에 일원이 되었다는 가설을 위해서 공백은 필수적이며 담론의 촉발재가 된다. 그렇게 영화는 사람이 삶에 대해 가지는 가치관을 드러내게 하고 서로를 알아보게 한다. <리틀 조>에 대해 이야기 하는 우리는 과연 오묘한 기류와 낯선 존재에 대한 긴장을 넘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사각거리는 속삭임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