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신체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쓸만했던 관절들이 고장 났고, 안 그래도 퍼석거리던 피부가 더 건조해졌다. 양면성 없이 나쁘기만 한 이런 변화들은 나를 잠시 슬프게 한다. 정원이를 얻기 위해선 응당 겪어야 할 변화들이었다. 그래서 잠시만 슬프다.
나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오로지 엄마인 것이다. 사실 그 사실은 하나도 슬픈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시간과 육체가 정원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 애석한 일이 아닌다. 그러나 내가 오직 엄마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 그 것이 슬펐다.
임신을 하고 나빠졌던 눈이, 출산을 하고 나서 더 나빠졌다. 침침해진 눈 탓에 휴대폰의 작은 글씨를 읽을 수도, 책을 오랫동안 읽을 수도 없어졌다. 안경을 맞춰야겠다고 생각해 안경점에 들렀다. 제일 저렴한 안경테와 중간 정도 가격의 안경알을 고르자 안경사는 내게, 안경을 제작하는 동안 인적 사항을 적어달라고 했다. 안경사가 건넨 종이에는 이름, 나이, 직업, 연락처와 같은 개인 정보를 적는 란과 어떤 광고를 보고 이 곳에 들르게 된 것인지, 주변인에게 이 안경점을 추천할 의향이 있는지 등의 물음이 적혀 있었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때나, 오프라인 매장에서 값비싼 물건을 살 때 수도 없이 답변한 물음들이었다. 단 1초도 고민할 여지가 없는, 답이 뻔한 질문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수 초 간 고민했다. 나의 직업은. 나의 직업은?
직업을 적어 넣는 칸에서 시선은 멈췄다. 퇴사를 하고 난 뒤 처음 받는 질문이라서 나의 직업을 뭐라고 적어 넣어야 할지 망설였다. 회사를 다니지 않으니까 백수라고 적어야 하나 했다가, 아이를 키우니까 엄마라고 적어야 되나 고민했다. 그 사이 안경 제작을 완료한 안경사가 돌아와 내 앞에 섰다. 나는 어색한 웃음이 섞인 말투로 "여기에 뭐라고 써야 하죠? 저는 그냥 집에 있는데..."라고 말했고 안경사는 그럼 '주부'라고 쓰라고 했다. 그랬다. 적절한 표현이다. 나의 직업은 주부다.
내 나이의 주부들은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운다. 매우 중요한 일이자 중요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어쩐지 슬프다. 나에게는 꿈이 있지만 꿈은 직업이 될 수 없다. 꿈은 그 단어 자체로 현실이 될 수 없고 그러므로 나의 직업은 오직 주부다.
주부는 수십 가지의 일을 한다. 더러워진 바닥을 쓸고 닦고 오염된 옷가지를 세탁한다. 아기를 품에 안고 집 안 곳곳을 걷다가 쾌쾌해진 집 안 공기를 실감하고 창문을 열어 집안을 환기시킨다. 육아를 포함한 가사일은 끝이 나질 않고, 그 작업들은 외롭다. 값이 매겨지지도 않는다. 주부에게는 동료도 없고 월급도 없다. 그저 전 세계 사람 모두가 하는 일을, 본인만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당사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다가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게 된 것일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늘보다 먼저 고층의 아파트들이 눈에 찬다. 무수히 많은 집, 그 집들을 지탱하는 수많은 주부들. 저들의 오늘 하루는 어땠을까. 모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려나.
여러분! 모두 안녕하시죠! 끼니 잘 챙기세요!
내 직업은 주부. 적응하는 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