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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Mar 27. 2024

몽당연필을 씁니다

사각사각 경쾌한 소리

오늘도 몽당연필이 하나 늘었다.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 보면 연필이 금방 작아진다. 몽당연필은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의 흔적이다. 아이들이 열심히 고민하고 생각하며 써 내려간 글의 흔적이기도 하다. 연필이 아이들 손에 잡기 불편해질 만큼 작아지져 몽당연필이 되면 그건 내 것이 된다. 몽당연필은 나에게 기념품 같기도 하고, 상장 같기도 하다.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부터 연필은 직접 깎아서 학생들에게 주었다. 첫 수업에 뭘 들고 가야 하냐고 어머님들이 물어보시면 "그냥 즐겁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몸만 오면 됩니다"라고 대답한 게 그 시작인 듯하다. 1분 1초라도 아끼고 흐트러짐 없이 수업을 하고 싶어 잘 깎여진 연필을 아이들에게 내미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매일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연필을 깎는다. 오늘은 몇 개의 연필이 필요할까를 생각하며.


HB연필은 좋아하지 않는다. 진하게 꾹꾹 눌러쓰기 좋은 2B 연필이 좋다. 뭐든 흐린 건 별로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게 좋다. 

가끔은 아이들에게 지우개를 내미는 내 손이 머쓱해진다. "여기에도 지우개 있어요."하면서 연필에 달린 지우개로 잘못 쓴 걸 쓱쓱 지워낸다. 아이들은 지우개 달린 연필을 좋아하고 익숙하게 쓰지만, 나는 여전히 연필과 지우개를 따로 쓴다. 세대차이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따로 쓰는 지우개가 훨씬 더 잘 지워지는 것 같다. 


학교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국제학교 아이들은 지우개를 잘 쓰지 않는다. 잘못 썼을 땐 지우고 써야지 깨끗하고, 알아보기 쉽다고 아이들에게 말하지만, 아이들은 꽤나 억울해한다.

"우리 학교 선생님은 틀렸을 때 지우지 말고 이렇게 연필로 긋고 쓰라고 한단 말이에요. 지우면 혼나요."

지우개로 잘못 쓴 걸 지우면 혼난다고? 정말일까? 확인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나라마다의 문화 역시 참  다르다. 지우개를 많이 쓰는 것도 한국 문화일까? 


그래도 이제는 글쓰기 수업에서 아이들도 지우개를 잘 사용한다. 아이들이 글쓰기를 시작하면 나는 한 손에 지우개를 들고 기다린다. 물론 아이들이 쓴 글을 쓱쓱 다 지워내려고 지우개를 들고 있는 건 아니다. 아이들의 글은 언제나 존중한다. 맞춤법이 어려운 아이들, 문장 구성이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지우개를 든다. 글쓰기를 하는 동안에는 선생님 신경 쓰지 말라고 일부러 안 보는 척하려고 하지만, 짧은 글쓰기도 자연스럽게 써 내려가는 게 어려운 친구들에게는 선생님의 가이드가 필요하다. 그래서 수업에서 연필은 금방 짧아지지만, 지우개는 오래 쓰는 편이다. 


"이렇게 작아진 연필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니?"

"작은 연필? 이름이 있어요?"

"있지. 몽당연필이라고 불러. 귀여운 이름이지?"


아이들은 작아진 몽당연필을 좋아하지 않는다. 새로운 연필을 연필꽂이에 같이 꽂아두면 아이들은 늘 가장 길쭉한 새 연필을 꺼낸다. 나는 아이들의 손때가 묻은 몽당연필이 좋다. 기분이 좋아진다. 몽당연필만 모아둔 통에 연필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보람을 느낀다. 일부러 몽당연필로 하루 일과표를 짜고, 아이들과의 독서 퀴즈 문제를 내고, 책에 밑줄을 친다. 몽당연필을 쓰면서 아이들의 기운을 받는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만큼 연필은 작아진다.

내 열심의 흔적인 것도 같아서 나는 몽당연필이 좋다. 

몽당연필은 나의 자랑이다.

주말 수업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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