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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Aug 23. 2024

행복은 들풀처럼

영화 <행복한 라짜로> - 이런 식으로 말해보면 어떨까?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돌아왔다.

  짧게라도 쓰고, 뭔가 이뤄낸 것처럼, 할 일을 다 끝마친 사람처럼 굴기 위해서 노트북을 열었다. 그래야 기분이라도 좀 나아질 테니까. 해야 할 일들을 잔뜩 쌓아두고서는 기분이 좀처럼 나아질 순 없으니까 말이다.




  이번에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는 <행복한 라짜로>다.

  다행히도 엄청 예전에 본 영화는 아니고, 같은 8월에 본 영화이긴 하니까 그래도 이 매거진에 등장할만한 자격을 갖춘 영화다.



  한동안 같은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키메라>가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던 때가 있었다. 지난 4월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그때쯤 <키메라>와 함께 그녀의 전작이었던 <행복한 라짜로>가 많이 언급되어서 관심 깊게 지켜보고 있다가, 이번에 극장에서 봤다.

  영화는 누가 뭐래도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전지전능한 신이 나타나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게 아니라, 신인 줄 모른 채(사실 뭐 영화에서도 신이라고 나오진 않는다.) 그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그러니까 우리들을) 굉장히 관망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한편으론 조금 우울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사람들,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들이 마냥 그렇게 긍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지 만은 않으니까. 권세를 누리던 부잣집과 그 도련님은 패망했고, 현대판 노예처럼 부려지던 사람들은 운 좋게(?) 노예마을에서 벗어났지만, 정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으니 말이다.


다리도 끊어져 도시와 소통이 단절 된 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라짜로 그리고 결국에는 탈출하는 마을 사람들



  그를 일찌감치 신으로 알아봤더라면, 신으로 모셨다면 삶이 달라졌을까? 구원받았을까?

  우린 결국 구원받을 수 없는 걸까?


패망해버린 부잣집 도련님


  아무튼, 이 영화 속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을 하나 꼽아보고 싶다.


  라짜로와 함께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돌아와서 가난하게 살고 있던 와중에, 다시금 라짜로를 만나 라짜로를 데려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가난하기에, 돈을 훔치거나 사람들에게 작은 사기를 쳐가며 마련한 돈으로 옷을 사 입고, 먹을 거를 마련하곤 하는데, 그런 그들에게 라짜로가 집 주변에 자라난 잡초 아닌 잡초들을 가리키며 먹을 수 있는 것들과 먹을 수 없는 것들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저건 먹을 수 없는 거구요, 이건 먹을 수 있어요."


  이 장면을 이런 식으로 말해보면 어떨까?


  이 장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신, 혹은 천사가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그들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어 인간들이 배부를 수 있게, 일종의 구원을 주는 장면처럼 여겨진다. 심지어 그들은 그 나물들(?)을 캐서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 배부르게 식사를 하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풀들은 그들이 전부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들이 현대판 노예처럼 산속에 갇혀 아무것도 모른 채. 부당한 노역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들이 캐 먹던 것들이다. 그러니 천사는 새로운 지식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깨달음을 주었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먹을 것 =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지천에 널려있던 행복들을 알아보고 취하는 건, 향유하는 건 결국 나의 몫이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겠다. 지치고 고단한 삶 속에 살고 있어서, 지천에 피어있는 행복들을 나는 깡그리 무시하고 지내고 있는 건 아닐까?


집 앞에서 캔 나물들로 부족하지만 행복한 만찬을 즐기는 가족, 이제는 사기를 치지 않고, 정당하게 나물을 팔기까지 할 수 있다.


  갑자기, 문득, 다른 얘기 같을 수 있겠는데, 이튿날 저녁에 일 끝나고 동료들과 함께 양꼬치를 먹으러 갔던 순간이 떠오른다. 정말 별거 아닌 순간이었다. 평소와 같이 일했고, 다른 날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양꼬치를 먹으러 갔을 뿐이다. 그런데 아직 양꼬치도 나오기 전인데, 가게가 바깥의 날씨와 달리 너무 시원했던 탓일까, 너무 편안했고, 곧이어 행복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편안히 앉아 편안히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날 행복하게 했다. 물론 곧 나올 양꼬치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처럼 별거 아닌 순간에도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가 있다. 행복은 내가 찾아 나서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지천에 깔려 있는 행복들을 우리가 알아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우리들 모두 천사가 행복을 알려주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고단한 삶 속에서도 막간의 여유를 만들고,

  지천에 깔려 있는 행복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유심히 지켜보는 삶을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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