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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l 23. 2024

이야 이제 진짜 큰일이다.

영화 <멜랑콜리아> - 이런 식으로 말해보면 어떨까?

*이 글에는 영화 <멜랑콜리아>의 스포일러가 '알게 모르게', '일정 부분' 담겨 있습니다.

영화의 스포일러에 예민하신 분들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매거진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고 나니까.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다. 그래도, 나름 그 압박감을 피할 구멍을 파두긴 했는데, 무슨 요일에 글을 쓰고, 무슨 요일에 글을 편집하고, 무슨 요일에 글을 올릴지 여태껏 정하지 않았다는 것. 일정이 정해진 게 없으니 조금은 편하게, 부담 없이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이게 내 나름대로 파 놓은 구멍이다. '오늘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건덕지랄까.

  아, 의도하진 않았지만 한 가지 더 구멍을 더 파 두기도 한 것 같다. 지난번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아 이건 너무 긴데?”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또 다른 구멍이자 변명이다. 그렇게 길게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또 조금 부담을 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니 이번에는 조금 더 하고 싶은 말을 줄여보자.




  이번엔 무슨 영화에 대해서 쓰면 좋을까 또 한참을 고민했다. 한 주에도 영화를 여러 편 보는데, 개중에 내 이야기와 묶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이렇게나 적을까.


  아무튼, 긴 고민 끝에 선택받은 영화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다.



  지금(글을 쓰고 있는 7월 23일 기준) CGV 아트하우스에서는 <라스 폰 트리에(이하 트리에)> 감독전을 하고 있다.(거의 끝물이다.) 트리에 감독을 놓고, 다들 명장이다, 명감독이다 하며, 하도 말이 많아서 나는 전부터 그의 작품들을 리스트업 해두었었다. 이전에 <안티크라이스트>라는 작품은 봤고, 그를 통해 그의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이었는데, 확실히 어떤 흥미가 가는 감독인 건 확실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마침 이렇게 특별 상영을 해주니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그의 여러 영화들을 잔뜩 예매했다.

  그래서 이번에 <멜랑콜리아>, <유로파>, <백치들>을 봤고, 마지막 <어둠 속의 댄서>까지 총 4편이나 몰아 봤다. <님포매니악> 시리즈와 <도그빌>, <만델레이>는 아무래도 OTT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다. 나름 비주류 영화(?)이기에 상영관이 많지 않아서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게 참 아쉽다. 아, <브레이킹 더 웨이브>도 봐야 하는데...



  아무튼, 개중에 <멜랑콜리아>를 선택한 이유는 이 영화가 그나마 좀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명하기도 쉽고, 내 이야기와 붙이기도 쉬워 보였다.

  그의 다른 작품들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참 뒤에 “아!”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인데, 이 영화만큼은 영화관 안에서 “아!”가 이미 이루어졌고, “오~”하는 순간까지 있었다. 그 말인 즉, 영화를 보는 와중에 실시간으로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이 되었고, 그의 표현 방식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는 뜻이겠다.


  이렇게 <멜랑콜리아>를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이 작품이 트리에 감독의 우울 3부작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아둬야 한다. 그리고 트리에 감독에게 만성 우울증이 늘 따라다닌 다는 사실 또한 함께 알면 좋겠다.


  트리에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본인의 우울, 타인의 우울, 또 각자만의 우울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 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또 이 매거진의 법칙에서 어긋나니까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아무튼, 또 기억에 남는 어떤 한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쉽게도 이 장면은 특이한 장면은 아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 법한 장면,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이다. 아니 사실 이걸 클라이맥스라고 하기도 뭐 한 게, 이건 그냥 어떤 충격적이고도 아주 멋졌던, 그런 엔딩 장면이다.


  이 영화는 2가지 파트로 나눠져 있다. 1부는 영화의 주인공, 저스틴의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2부는 소행성 ‘멜랑콜리아’(이름부터가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참 쉽게 지어졌다.)와 지구가 충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마지막에는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충돌하는 장면이 펼쳐지는데, 그 마지막장면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비주얼적으로도, 사운드적으로도 너무 충격적이어서,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조차 잊을 수 없는 장면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그 장면을 이런 식으로 말해보면 어떨까?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우울감, 혹은 압박감, 그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주인공 자매와 아들은 소행성충돌에 대비해서 했던 일이라곤 나뭇가지를 깎아서 만든 작은 집을 짓는 것 밖에는 없었다. 사실 그걸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냥 어떤 ‘안쪽’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게끔만 만들어진 오두막… 아니… 일종의 텐트…, 아니… 일종의 심볼…, 그 아무튼 뭐라고도 할 수 없는 ‘무언가’를 그들은 만들었다. 그것도 아주 무기력하게 말이다. 그리고는 아주 당연하게도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고, 이들은 죽음을 맞는다.


  나는 트리에 감독처럼 우울에 쪄들어 있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도 나만의 우울, 그리고 그걸 넘어 피할 수 없는 압박감 같은 게 있다. 그리고 감독은 내게, 그런 우울과 압박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네가 아무리 나뭇가지로 텐트를 만들건, 어떤 의식을 하건, 어떻게 발버둥을 치건간에 그 우울과 압박감은 널 덮칠 테고, 그렇게 넌 죽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조금 우스개를 섞어서, 지금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던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압박감 같은 게 밀려왔었다. 앞서 얘기한 일련의 압박감 말이다. 글을 써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매거진이라고 이야기했으니까 (나름) 정기적으로 써내야 한다는 것. 그런 압박감 말이다.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압박감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없겠다. 그냥 나는 그 압박감을 ‘그래 나는 그냥 죽는구나.’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야만 하고, 그 압박감의 앞에서 그냥 무기력한 텐트 같은 거나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그냥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죽어버리고 말 테다. 텐트가 어떤 모양이었건, 얼만큼 보호를 해줬건 그런 건 필요 없겠다. 어차피 소행성이 충돌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이니까.

  그러니 그냥 글도 써버리면 끝인 거 아닐까. 압박감이야 다가오건 말건 죽음이 다가오건 말건, 그냥 나뭇가지로 텐트나 만들듯이 그냥 글을 쓰면 되는 거 아닐까. 똥 글이라도, 그냥 쓰면 되는 거 아닐까.



  물론 우스개를 섞어서 하는 이야기다.

  사실 뭐 이런 글 하나 쓰는 게 그렇게나 내게 큰 압박감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고 보니, 지금의 나는 확실히 글 쓰는 것에 대한 어떤 고민이 많은가 보다.



  보름달 보다 훨씬 더 밝게 태양 빛을 반사하는 멜랑콜리아,

  그리고 그 멜랑콜리아의 빛 아래에 알몸으로 누워서 멜랑콜리아를 만끽하는 저스틴,


  그 저스틴처럼 그냥 하늘에 떠 있는, 언제고 내게 떨어질지 모르는 저 우울감, 저 압박감을 즐겨야겠다. 언제 어디서든 나를 따라오는 달처럼 항상 하늘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멜랑콜리아, 그것처럼 언제 어디서고 불쑬불쑥 튀어나오는 우울감, 압박감. 그 속에서 허둥대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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