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나를 나답게 느끼게 해 주는 것
하얼빈, I may be wrong, Winnie the Pooh,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개밥바라기별, 최은영의 밝은 밤, 아버지의 해방일지, 오스카 와일드 단편집, 해녀들의 섬, 코끼리도 장례식에 간다, 쇼코의 미소, 보이지 않는 여자들, 하응백의 남중,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트레버 노아의 태어난게 범죄, 나는 아무개지만 그렇다고 아무나는 아니다,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 그리스인 조르바...
올 한 해 동안 우리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들이다. 20권 가까이 된다. 여기에 내가 개인적으로 읽은 책들까지 치자면 25권에 가까운 책들을 정독한셈이다. 복잡다단한 내 직업환경에서 한 달에 두 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무척 대견하다. 그러면서 곰곰 생각해 본다. 책을 읽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일까를.
어릴 적 우리 집에는 독서광이 있었다. 바로 큰언니. 하도 독특한 성격이어서 첫딸을 키우는 엄마는 감당하기 어려운 딸이었지만 동생들에게는 작은 영웅 같은 분이었다. 언니는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서 대전 여중고를 다닐 때 이미 아마추어 소설가였다. 국어시간이면 선생님의 성화에 못 이겨 자신이 쓴 단편소설을 급우들에게 읽어주었다는데 내가 자라면서 가장 많이 본 언니의 모습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모습은 나무의자를 뒤집어서 엉성하게 만든 독서대에 책을 얹어놓고 읽던 모습이다.
그런 언니는 책욕심이 끝이 없어서 우리 집 방 하나는 빼곡히 온갖 전집들과 단행본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 많은 책들 중 내가 가장 먼저 읽기 시작한 책들은 소년소녀 세계명작전집이었다. 그것이 몇 권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책장의 두 칸이 꽉 채워져 있었으니 3-40권은 되지 않았을까?
어느 겨울 방학, 아침녘부터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읽기 시작한 책은 어스름 저녁 무렵에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암굴왕(몽테크리스토 백작)이거나 제인에어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톰소여의 모험이거나 아라비안 나이트였을까? 무엇을 읽었었는지 기억나지 않으나 나는 마지막 책장을 넘기기가 너무 아까웠다. 한 장 한 장,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면 결국 다 읽고 말 텐데 어떻게 하지 싶었다. 다 읽고 나면 뭘 읽지? 야금야금 아껴먹듯 읽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방바닥의 따뜻한 느낌과 함께.
그렇게 시작된 나의 독서는 중고등학교까지 이어졌는데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은 사춘기의 나를 형성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었다. 내 기억하기로 나의 인문학적 소양은 학교 공부나 선생님들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엄마의 눈을 피해 가며 몰래 뽑아 들고 읽기 시작하던 바로 그 책들을 통해서였다. 청자 색깔 표지의 세계문학전집 속에서 나는 오만과 편견을, 파우스트를, 그리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만났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대학에서의 전공공부와 이어진 직장생활 등 인생의 새로운 과업은 책 읽기를 밀어내버렸다.
다시 나의 책 읽기가 시작된 것은 중년이 훨씬 지나서였다. 나는 이민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던 직장생활과 공부로 한가로이 전공 이외의 책을 집어들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민으로 모든 것이 중단되었을 때, 그러니까 더 이상 전공책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인문학 책을 집어 들었다. 아니 더 이상 의무적으로 읽지 않아도 되었을 때, 이민이라는 엄청난 혼란 속에 나를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책을 읽어야 했다. 알 수 없는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흔들리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책을 읽어야 했다. 이때 나는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올리버 색스를, 법정스님 등을 만났다. 이때 읽은 책들은 내가 어떤 삶의 결정을 내렸든 나 자신을 이해하고 그 삶을 받아들이라고,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알려주었다. 너무도 힘들었던 십수 년의 타향살이 세월 동안 내 곁을 지켜준 책들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피폐해졌을까.
최근에는 스스로를 재교육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나의 책 읽기를 독려하고 다양화하기 위해 북클럽을 활용한다. 각각의 개성을 갖는 북클럽 멤버들은 그들의 특성만큼 다양한 책들을 소개한다. 한국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최근의 한국소설들을 추천해 주고, 한국역사에 갈급한 이민 1.5세는 근현대사를 알고 싶어 한다. 시낭독을 좋아하는 낭랑한 목소리의 멤버는 시 읽기도 빠뜨리지 말자고한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와 장르의 책들을 읽으며 나는 내가 더 깊어지고 자라는 느낌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책을 읽는 나는 가장 나답다는 느낌을 준다. 세상이 주목해주는 명예나 부는 없어도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런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그저 나는 제주 4.3 사건에 울분을 터뜨리고, '지금'의 삶에 집중하라는 조르바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존재일 뿐이다.
올해는 그럭저럭 잘 살았다. 세상은 갈수록 내 마음을 흩뜨려지게 하지만 책 읽기가 있어서 무시로 추스르고 다둑이면서 살았다. 그것도 같은 마음으로 함께하는 북클럽 친구들이 있어서 힘을 내며 같이 걸었다.
오늘 저녁엔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모임이 있는 날이다. 각자 음식 한 접시씩 가지고 와서 그동안의 책 읽기를 결산하며 한 해 동안의 책 읽기를 되돌아볼 예정이다. 누군가는 닭튀김을 가져온다 했고 또 누군가는 과일을 준비한다고 했다. 나는 잘 삶은 팥을 넣은 찰밥을 지어볼 생각이다. 찹쌀의 찰기로 '함께했던 우리의 마음'을 격려하고, 팥으로 '삿된 마음'을 물리쳐버린 것을 함께 축하해야겠다.
올 한 해도 책 읽기가 있어 나는 나답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