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관심 속에 호접란이 다시 피다.
작년 삼월 내 생일날 받은 호접란 화분.
모든 꽃잎들이 활짝 피어 내게 생일 축하 꽃다발 못지않은 화사함을 안겨주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꽃들은 떨어지고 네 장의 넓은 이파리와 줄기, 그리고 화분 밖으로 노출된 허연 뿌리의 모습으로 내 곁에서 거진 일 년을 보냈다.
호접란을 받았을 때도 '하필, 왜 이 화분을 골랐을까..', 싶었다.
호접란만큼 선물하기 손쉬운 화분이 없으니까, 또 호접란만큼 몇 달 뒤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기 쉬운 화분도 없으니까, 언제나 그랬듯이 한 번도 일 년 이상 키워본 호접란 화분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일날 받은 화분도 꽃이 떨어지고 나면 구박덩이가 되었다가 쓰레기통 신세가 되리라 지레 짐작했다.
호접란은 간접광에 5-6시간 정도의 일조시간이면 충분하단다. 온도는 섭씨 16-27도로 사람들이 쾌적하다고 느끼는 정도면 충분하고 뿌리가 마른 듯싶으면 물을 주면 된다니 화초 가꾸기에 초보나 무심한 사람들이 키우기 적합한 화초이다. 그렇게 키우기 쉬운 호접란을 그동안 나는 무수히도 죽여왔다.
마땅한 선물이 생각나지 않을때 선택하는 호접란.
꽃다발은 길어봐야 일주일인데 반해 그래도 화분이니 그보다는 오래 버틴다. 얼마뒤 꽃들이 떨어지고 나서도 파란 잎사귀들이 있으니 그 덕에 조금 더 곁에 둔다. 하지만 놓이는 자리는 더 이상 식탁 위나 책상 위가 아닌 후미진 곳으로 밀려나고 만다. 그렇게 몇 달을 주목받지 못한 채 놓여있다가...
"아이코, 이게 왜 이렇게 말라버렸냐.. 쯧쯧쯧... 버려야겠군..."
이렇게 내손에서 버려진 호접란 화분이 얼마나 많은지 기억도 못하겠다.
작년 생일날 받은 호접란은 사람들이 많고 부산한 위층이 아닌 반지하의 내 생활공간으로 들여왔다.
그리고 동남쪽으로 나있는 이그레시브 윈도 창틀 위에 놓았다.
그 창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하루종일 간접광이 드는 곳이다.
무엇보다 스튜디오 스타일의 생활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공간이다.
잠에서 깨어 창밖이 얼마나 밝았는지를 보려다 보면 화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뿐이 아니다.
책상에서 일어나면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티브이를 끄면서도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눈길을 주게 되고 한 번씩 손가락으로 화분의 물기를 확인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게 되었다. 물을 주다보니 화분밖으로 축축 처져있는 뿌리들이 안스럽게 보였다. 그것들도 한가닥씩 화분 위로 말아 올려주고 가녀리게 뻗어있는 줄기도 지지대에 묶어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러니까 두 달 전쯤 앙상한 줄기 끝에 무엇인가가 매달리기 시작했다.
뭔가싶어 자세히 들어다보니 꽃망울이었다!!!
그것도 모두 7개의 크고 작은 꽃망울.
과연 이 꽃망울들이 꽃을 피울까?? 갑자기 호접란 화분이 내 일상에 환한 빛으로 쑤욱 들어왔다.
매일 아침과 저녁 우리 부부는 화분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몇송이가 피었는지, 밤사이 새로운 꽃망울이 터질지 말지를 가늠하느라 이야기꽃을 피웠다.
며칠 간격으로 피어난 꽃들은 처음 꽃화분을 받았을 때랑 다름없는 꽃분홍색의 꽃들이었다. 꽃 크기도 처음과 다를 바 없었다.
세상에나, 이런 일도 다 있구나. 호접란을 살려 다시 꽃피는 것을 보게 되다니...
꽃과 식물을 좋아할 뿐 가꾸는 데는 젬뱅인 내가, 아니 고백하자면 사실은 남편이 호접란을 살렸다.
물 좀 주라고 잔소리만 했을 뿐 특별히 가꾼 것도 아닌데 호접란이 우리에게 지켜보는 기쁨을 선물해 주었다.
그것도 한두송이가 아닌 무려 일곱 송이다. 그리고 어제는 꽃대의 마지막 끝에 매달려있던 작은 꽃망울이 끝내 피었다. 완벽하게 거의 일년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내 생일까지는 앞으로도 한 달이 남아있지만 나는 이미 가장 근사한 생일 선물을 받았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관심과 돌봄으로 이런 결실이 있었으니 그저 그렇게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삶을 살아가라 꽃이 내게 이르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꽃들이 지고 말때까지 나는 매일 아침, 그날이 생일이라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행운의 일곱 송이를 바라보며.